5화
‹ ›성문을 통과하는 순간 경비병들이 마차를 세우고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그중 한 명이 나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옆 동료에게 뭐라 속삭이는 모습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또 저 표정이구나.' 놀람과 경멸이 반씩 섞인 그 눈빛에 나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매번 가슴 한켠이 조금씩 무너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경비병 하나가 창끝으로 마차 문을 툭툭 두드리며 뭔가를 확인하려 들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무릎으로 떨어뜨렸다. 이런 순간에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걸, 나는 몸으로 배워온 사람이었다.
강도현이 신분을 밝히자 경비병들의 태도가 순식간에 달라졌는데, 몇 번이나 허리를 굽히며 통과시켜준 걸 보니 이 남자가 이곳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진 인물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조금 전까지 창끝을 들이대던 손이 이제는 공손하게 마차 문을 열어주고 있었고, 그 낙차가 하도 커서 나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전쟁 영웅이라더니, 아무래도 진짜 유명한가 보네.' 나는 그 사실을 왜 지금까지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차가 다시 궁전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조용히 지켜보았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성벽의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무겁게 느껴졌다.
마차 안에서 강도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옆얼굴이 조각처럼 딱딱해 보여서 나는 괜히 말을 걸기가 무서웠다. 대신 나는 그의 침묵을 이용해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을 다시 곱씹어보았다. 노예 시장에서 이 남자의 손에 낙찰된 게 불과 사흘 전인데, 벌써 이렇게 궁전 코앞까지 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이 속도라면, 내일이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손끝이 저절로 떨려왔고, 나는 그걸 감추려고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마차가 완전히 멈춘 곳은 궁전 뒤편의 작은 마당이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몇 사람이 등불을 든 채 기다리고 있었고, 그중 유난히 밝은 목소리로 뛰어나온 이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오셨어요! 오래 기다렸어요!" 발음이 조금씩 어긋나는 공용어였는데, 그 어눌함이 오히려 정겹게 들려서 나는 잠시 경계심을 풀었다. 등불 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둥글고 순박했고, 두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어쩐지 강아지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자신을 소미라고 소개하며 청림 마을 출신이라고 밝혔는데,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청림 마을이라니.' 내가 태어나고 불태워진 그 마을 이름을 이곳에서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고, 소미의 얼굴을 다시 살펴보니 은근히 낯익은 이목구비가 있어서 나는 혹시 마을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눈매의 각도, 웃을 때 살짝 올라가는 왼쪽 입꼬리, 그 모든 것이 어렴풋이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마을이 불타던 그날의 기억은 연기와 비명으로만 남아 있었고, 그 속에서 개별 얼굴을 골라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도 거기서 왔어요, 오래전에 여기 팔려왔지만요." 소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지만, 그 웃음 뒤에 숨은 세월의 무게가 얼핏 느껴져서 나는 함부로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더 늘어놓지 않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는데, 그 능숙한 회피의 방식이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많은 것을 삼켜왔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서 낯설지 않은 동질감을 느꼈다. 우리는 같은 흙에서 자라 다른 방식으로 뽑혀 나온 두 뿌리 같았다.
소미가 나를 데리고 궁전 내부의 작은 별채로 이동하는 동안, 그녀는 계속해서 재잘거리며 이곳 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흘려주었는데, 그 말투가 어쩐지 오랜 시간 혼자 떠들어온 사람처럼 리듬을 타고 있어서 나는 몇 번이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여기 복도는 밤에 걸으면 안 돼요, 시녀장님이 순찰 도세요, 되게 무서워요." "저쪽 정원엔 장미가 있는데 가시가 진짜 커요, 저번에 손가락 찔려서 며칠 부었어요." 쓸데없는 정보들이었지만 그 쓸데없음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내가 팔려온 노예가 아니라 그냥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는 상대처럼 느껴졌으니까.
"목욕물 준비했어요, 옷도 새 거예요, 저 골랐어요!" 그녀가 자랑스럽게 내놓은 옷은 은은한 연둣빛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품이 넉넉하게 재단되어 있어서 내 몸을 크게 가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맷단에는 작은 자수가 놓여 있었는데, 서툰 바느질 솜씨가 눈에 들어와서 나는 혹시 이걸 소미가 직접 만든 건 아닌지 묻고 싶어졌지만, 어쩐지 그 질문이 너무 사적으로 느껴져 입을 다물었다.
목욕을 하는 동안 소미는 등을 씻겨주겠다며 곁에서 시중을 들었는데, 그녀의 손길이 내 몸을 스칠 때마다 나는 은근히 몸이 굳었다가도, 그녀의 눈빛에서 혐오나 조롱의 기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조금씩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물의 온도는 적당했고, 향유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서 오랜만에 몸이 노곤해지는 걸 느꼈다. 노예 시장의 우리 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사치였다.
"엘프님 몸, 진짜 신기해요." 신기하다는 말이 다른 이의 입에서 나왔다면 나는 곧바로 몸을 웅크렸을 텐데, 소미의 목소리에는 순수한 감탄만이 담겨 있어서 나는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내 귀 끝을 살짝 만져보며 "이렇게 뾰족한 거 처음 봐요, 동화 같아요"라고 중얼거렸는데, 그 표현이 어느 세계의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고 말았다. '이 사람, 정말 나를 이상하게 안 보는 건가.' 그 낯선 감각이 오히려 더 어색해서 나는 물속에서 살짝 몸을 움츠렸는데, 소미는 그 반응을 눈치채고도 별다른 말없이 그저 부드럽게 물을 끼얹어줄 뿐이었다. 물줄기가 등을 타고 흐르는 감촉이 이상하게도 위로처럼 느껴졌다.
목욕이 끝나고 새 옷으로 갈아입자, 소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이리저리 살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인형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즐거워 보여서 나는 조금 어이가 없으면서도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내 머리를 빗겨주며 몇 가지 매듭을 시도해보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시 풀고, 또 다른 방식으로 땋아보고를 반복했다. "이렇게 하면 예쁠 것 같은데... 아니다, 이게 낫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오랜만에 사람 사이의 온기 같은 걸 느꼈다. 누군가가 순전히 나를 예뻐 보이게 하려고 시간을 쓰는 게, 이곳에 온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별채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문이 열리며 강도현이 들어와 짧게 알렸다. "내일 아침, 폐하께서 직접 뵙자 하십니다." 그 말에 소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는데, 빗을 든 손이 허공에서 멈춘 채 굳어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도현의 표정을 살피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는데, 그 침묵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좋은 소식이면 저렇게 굳을 필요는 없을 텐데.'
"폐하께서... 직접이요?" 소미가 조심스럽게 되물었지만, 강도현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무뚝뚝함 위에 아주 미세한 긴장이 얹혀 있었는데, 그걸 느낀 순간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전쟁 영웅이라 불리는 이 남자조차 긴장할 만한 자리라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존재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나는 그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내리는 게 두려워서 일부러 생각을 멈췄다.
강도현이 나가고 문이 다시 닫히자, 방 안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소미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폐하는 무서운 분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라고 말했지만, 그 말투에 담긴 어색한 떨림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위로하려는 말이 오히려 불안을 더 키운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말에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목구멍이 순간적으로 좁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다가올 아침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등불이 벽에 만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게 흔들리고 있었고, 나는 그 그림자를 바라보며 밤이 조금이라도 더 길게 남아 있어 주기를, 부질없이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