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저녁 6시. 농장으로 이동하는 길에 다른 신입들도 합류했다.
버스는 없었다. 다들 걸어서 움직였다.
흙길이 이어졌다. 발밑에서 자갈 밟히는 소리가 났다.
사각사각.
농장을 안내할 사람은 박정훈이라는 남자였다. 선배 노동자였다.
체구가 작았다. 얼굴이 까맣게 탄 것이 오래 밖에서 일한 사람 같았다.
다들 처음이라 헷갈릴 텐데, 천천히 알려드릴게요. 박정훈이 웃으며 말했다.
웃음이 소박했다. 오미래와는 다른 종류의 친절이었다.
오미래의 웃음은 뭔가를 감춘 웃음이었고, 박정훈의 웃음은 그냥 웃음이었다.
오래 계셨어요? 서연이 물었다.
한 8개월 됐나. 박정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8개월이나요. 준호가 되물었다.
계약 기간이 늘어나면 그렇게 되죠. 박정훈이 담담하게 답했다.
담담한 게 더 불안했다.
계약 기간이 늘어난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최소 6개월이라던 강태식의 말과 어긋났다.
늘어난다는 게 어떻게 늘어나는 건데. 준호가 속으로 물었다.
물어봐야 할까, 아니면 지금은 넘겨야 할까.
일단은 넘기기로 했다.
오늘 과제는 저 창고에 있는 상자들 정리하는 거예요. 무게별로 분류하면 돼요. 박정훈이 손가락으로 창고를 가리켰다.
창고는 낡은 컨테이너였다. 안에 수십 개의 상자가 쌓여 있었다.
먼지 냄새와 나무 냄새가 섞여 났다.
무게 표시가 안 되어 있는 상자들이었다.
일일이 들어서 확인해야 하나요. 서연이 물었다.
네, 그게 규칙이에요. 박정훈이 대답했다.
규칙이라는 말이 자꾸 나왔다.
이 섬에서는 다들 규칙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하는구나. 준호가 생각했다.
다들 상자를 하나씩 들기 시작했다. 서연도 상자를 들어 올렸다. 무거운 상자에 몸이 흔들렸다.
으윽. 서연이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다른 신입들도 하나둘 상자를 붙잡고 씨름했다.
누구는 상자를 못 들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누구는 상자 모서리에 손을 찍혀 얼굴을 찡그렸다.
준호는 상자를 들지 않았다. 대신 창고 벽에 붙은 작은 단말기를 발견했다.
작업 관리 시스템. 상자마다 부착된 태그를 스캔하는 장치였다.
먼지가 잔뜩 앉아 있었다. 오래 안 쓴 게 분명했다.
준호는 태그 하나를 살펴봤다. 바코드 형식이었다. 게다가 오래된 프로토콜이었다.
이거, 그냥 재고 관리용 시스템인데.
이런 걸 왜 안 쓰고 사람 몸을 굴리는 거지. 준호가 속으로 물었다.
굴리려고 안 쓰는 거겠지. 준호가 스스로 답했다.
서연아, 상자 들지 말고 이거 봐봐. 준호가 태그를 가리켰다.
이게 뭔데. 서연이 물었다.
이 단말기로 태그만 스캔하면 무게 데이터가 자동으로 뜬대. 준호가 단말기 화면을 조작했다.
딸깍.
화면에 숫자가 떴다. [12.4kg]
서연의 눈이 커졌다. 이걸로 다 되는 거야?
이걸로 다 돼. 준호가 짧게 답했다.
서연이 상자를 내려놨다. 허리를 짚고 숨을 골랐다.
준호가 옆에 있던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슬쩍 알려줬다.
다들 놀란 표정으로 몰려들었다.
이거 처음부터 쓸 수 있던 거였어요? 누군가 물었다.
몰랐죠. 아무도 안 알려줬으니까. 준호가 답했다.
박정훈이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어,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박정훈이 물었다.
장치 붙어 있길래 만져봤어요. 준호가 태연하게 답했다.
원래 신입들은 다 손으로 들어서 하던데. 박정훈이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몇 달 동안 그렇게 시켰던 거예요? 준호가 되물었다.
박정훈의 웃음이 살짝 굳었다.
다들 그렇게 배우니까요. 박정훈이 짧게 답했다.
준호는 대답 대신 단말기를 계속 조작했다.
삐빅. 삐빅. 삐빅.
순식간에 상자 열 개가 분류됐다.
삐리링. [과제 완료. 점수 30점 지급.]
준호의 목걸이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서연의 목걸이에서도 같은 알림이 떴다.
30점. 서연이 목걸이 화면을 들여다봤다. 작은 숫자가 표시돼 있었다.
[누적 점수: 30]
다른 참가자들은 여전히 상자를 들며 씨름하고 있었다.
땀에 젖은 얼굴들이었다. 숨을 헐떡이는 사람도 있었다.
준호와 서연만 창고 한쪽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박정훈이 준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사람, 뭐 좀 다르네. 박정훈이 속으로 생각했다.
겉으론 웃으며 넘겼지만.
준호 씨, 원래 이런 일 하셨어요? 박정훈이 물었다.
비슷한 거요. 준호가 짧게 대답했다.
비슷한 거라니, 뭘 하셨는데요. 박정훈이 다시 물었다.
궁금해도 참아야 하는 질문이 있죠. 준호가 웃으며 넘겼다.
박정훈이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준호의 옆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남편이 이렇게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뭔가 마음이 놓이면서도, 동시에 낯설었다.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나. 서연이 속으로 생각했다.
결혼하고도 몰랐던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창고 밖으로 나오는 길, 준호가 서연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 섬, 시스템이 생각보다 허술해. 준호가 말했다.
허술해? 서연이 눈을 크게 떴다.
목걸이도, 저 단말기도, 다 오래된 방식이야. 준호가 목걸이를 가리켰다.
그럼 저것도 만질 수 있어? 서연이 목에 손을 갖다 댔다.
아직은 몰라. 근데 가능성은 있어. 준호가 신중하게 답했다.
가능성이 있다는 말, 다시 해줘. 서연이 작게 웃었다.
가능성이 있어. 준호가 다시 말했다.
이번엔 조금 더 확신 있는 목소리였다.
서연의 눈에 희미한 희망이 어렸다.
그때 저편에서 오미래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흙길에 어울리지 않았다.
오늘 성과가 좋네요. 벌써 점수 올린 분들도 있고. 오미래가 웃으며 말했다.
준호는 그 웃음을 유심히 봤다.
웃음 뒤에 뭔가 계산하는 눈빛이 스쳤다.
선생님 덕분이죠. 준호가 짐짓 겸손하게 대답했다.
오미래가 준호를 잠시 응시했다.
시선이 길었다. 위에서 아래로 훑는 듯한 눈길이었다.
준호 씨, 원래 무슨 일 하셨어요? 오미래가 물었다.
사이버 보안 쪽이요. 준호가 대답했다.
오미래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그 반짝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준호는 알 수 없었다.
좋은 정보네요. 오미래가 태블릿에 뭔가를 입력했다.
준호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지금, 자기 정체를 밝힌 게 실수였을까.
너무 순순히 대답했나. 준호가 속으로 자책했다.
이 섬에서는 뭘 물어봐도 그냥 넘겨야 했나.
서연이 준호의 손을 슬쩍 잡았다. 왜 그래. 서연이 작게 물었다.
아니야. 준호가 애써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확신이 들었다.
이 여자, 지금 이 정보를 어딘가에 보고할 거다.
그리고 그 보고가 누구에게 가는지, 준호는 아직 몰랐다.
다만 강당에서 봤던 그 남자, 노현도의 눈빛이 떠올랐다.
여자들만 훑어보던 그 눈빛이.
서연을 보던 그 눈빛이.
준호의 손끝이 저도 모르게 서연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오미래는 이미 뒤돌아 걸어가고 있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준호는 그 뒷모습을 계속 지켜봤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