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새벽 세 시.
방 안은 완전히 어두웠다.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조차 새어 들어오지 않는, 짙은 어둠이었다.
도윤은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
몇 번이나 뒤척이다 겨우 잠든 참이었다.
그런데.
삐걱,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불 속에서 몸이 굳었다.
숨을 죽이고 소리가 난 방향을 가늠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어야 했다.
문은 잠겨 있었고, 창문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낡은 피아노 쪽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뭐야...'
처음엔 눈을 잘못 뜬 줄 알았다.
몇 번 눈을 깜빡였지만,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윤은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빛이 점점 밝아졌다.
처음엔 작은 틈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이내 피아노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쿠구구-
피아노의 형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가 밀어내는 것처럼, 몸체가 부풀었다 줄어들었다.
건반이 저절로 눌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무로 된 몸통 전체가, 숨을 쉬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도윤은 숨을 삼켰다.
손끝이 떨렸다.
이불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망쳐야 해.'
머릿속으로는 문을 향해 달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려 움직일 수 없었다.
발끝조차 침대 밖으로 내밀 수 없었다.
빛이 정점에 이르렀다.
방 안 전체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 안쪽까지 빛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쩌저적!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인지, 다른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빛 속에서 사람의 형체가 걸어나왔다.
갈색 장발에 앞머리가 눈썹 위에서 가지런히 잘려 있었다.
파란 눈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났다.
백색 블라우스에 줄무늬 스커트.
전체적으로 낯설지 않은 인상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아니 매일 마주했던 듯한.
그 자리엔, 낡은 피아노가 사라져 있었다.
바닥에는 먼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여자가 서 있었던 것처럼.
도윤은 숨이 턱 막혔다.
"누, 누구야...!"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여자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봤다.
시선이 벽지의 얼룩, 책상 위의 악보, 창가에 놓인 스탠드까지 하나하나 훑고 지나갔다.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을 확인하듯이.
허리를 펴고 팔을 뻗어보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펴보기도 했다.
그 동작이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신기해하는 아이 같았다.
"드디어."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드디어, 사람 몸으로 서 보네."
도윤은 침대 헤드에 등을 붙인 채 뒷걸음질 쳤다.
베개가 등 뒤로 밀려 떨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신, 어떻게 여기..."
"여기?"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내가 여기 없었던 적이 있었어?"
도윤의 눈이 커졌다.
방 안 어디에도,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그 여자가 서 있었다.
당연히 그 자리엔 낡은 피아노가 있어야 했다.
십오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 자리를 비운 적이 없던 피아노였다.
'설마...'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목덜미부터 팔뚝까지 좁쌀 같은 것이 돋아 올랐다.
"말도 안 돼."
도윤이 중얼거렸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네가 지금 보고 있잖아."
여자가 성큼 다가왔다.
발걸음 소리가 없었다.
맨발로 방바닥을 딛는 것 같았는데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도윤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등이 벽에 닿았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숨이 가빠졌다.
"가까이 오지 마."
목소리에 힘을 주려 했지만, 오히려 더 떨려 나왔다.
"왜?"
여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 얼굴인데도 서늘했다.
"15년 동안 매일 밤 네가 나 만지는 건 괜찮았잖아."
순간 도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뭐, 뭐라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건반 위에서, 손끝으로."
여자가 도윤의 얼굴 앞까지 다가와 속삭였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매일 밤 그렇게 나를 어루만졌잖아, 도윤아."
도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여자가... 소율이라고?'
피아노 앞에 앉을 때마다 습관처럼 불렀던 이름.
부모님이 처음 피아노를 사줬을 때, 다섯 살의 도윤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건반을 처음 눌러보던 그날, 서툰 손가락으로 짚어낸 첫 화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도윤은 그 피아노를 소율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을, 이 여자가 알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오직 도윤의 방 안에서만 존재했던 이름이었다.
"어떻게 그 이름을..."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건 내 이름이니까."
여자가 손을 뻗어 도윤의 뺨을 살짝 쓸었다.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
손끝이 피부에 닿는 순간, 도윤의 몸이 움찔했다.
도윤은 그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거짓말이야."
목소리가 떨렸다.
"거짓말이면, 증명해줄까?"
여자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옷자락이 사르륵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다시 빛이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번엔 처음보다 더 강렬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빛이 방 전체를 뒤덮었다.
도윤은 숨도 쉬지 못한 채, 그 빛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빛 속에서 여자의 실루엣이 다시 흐릿해지고 있었다.
'또 뭘 보여주려는 거지...'
도윤은 눈을 감을 수도, 뜬 채로 버틸 수도 없었다.
무릎이 완전히 풀려버린 채, 그 자리에서 굳어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