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 피아노가 여자라니

5화

카페 안은 조용했다. 창가 자리에 도윤과 소율이 마주 앉았다. 주문한 커피와 케이크가 나왔다. 하얀 접시 위에 놓인 조각 케이크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소율은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맛있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입가에 크림이 살짝 묻은 채로 웃었다. "15년 만에 처음 먹는 거니까." 그 말에 도윤은 잠시 말을 잃었다. 15년이라는 시간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동안 이 사람은... 아니, 이 존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도윤은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아직은 조용했다. 옆 테이블의 손님들도 각자 대화에 몰두해 있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도윤이 목소리를 낮췄다. 포크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하필 지금 변신한 거예요? 15년 동안 아무 일 없었잖아요." 소율의 손이 잠시 멈췄다. 포크 끝에서 크림 한 조각이 떨어질 듯 흔들렸다. "...너, 어제 콩쿠르에서 뭘 느꼈어?" 갑작스런 질문에 도윤이 눈을 깜빡였다. "뭘요?" "연주할 때, 손끝에서 뭔가 다른 느낌 없었어?" 도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느낌... 있었나?' 손끝이 미세하게 저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예선에서 떨어진 순간, 이상하게 익숙한 진동이 느껴졌던 순간. 건반을 누를 때마다 온몸을 타고 올라오던 그 낯설고도 낯익은 감각. "조금... 이상했던 것 같아요." 도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손끝에서 뭔가 울리는 느낌이었어요. 그냥 피아노 진동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거야." 소율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포크를 내려놓고 도윤을 똑바로 바라봤다. "뭐가요?" "네가 나를 부른 거야. 너도 모르게." 도윤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가... 불렀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때였다. 뒷자리에서 누군가 소율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진 건 도윤이 먼저였다. 등 뒤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저, 저기요." 낯선 여자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손에는 아이스커피가 담긴 컵을 들고 있었다. "제가 저 남자분 아는데... 콩쿠르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어서요." 도윤을 알아본 참가자였다. "강도윤씨죠? 이번에도 떨어지셨다고..." 말끝을 흐렸다. 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하필 이런 자리에서...' 콩쿠르 이야기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저희 매니저님이 그러시는데, 도윤씨는 아직도 그 낡은 피아노만 쓴다면서요. 신기해서요." 여자가 별생각 없이 덧붙인 말이었다. 소율이 그 말을 듣고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포크를 접시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낡은 피아노가 아니라, 저예요." 소율이 태연하게 말했다. "...네?" 여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컵을 든 손이 어색하게 멈췄다. "저기, 도윤이 15년 동안 저를 만졌거든요. 밤낮으로. 아주 정성스럽게." 도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소, 소율!" 도윤이 다급히 소율의 팔을 잡았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왜? 사실인데." 소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로 이상한 게 없다는 표정이었다. "매일 밤 저를 어루만지면서 얼마나 다정했는데. 특히 새벽에는..." "그만해요, 제발!" 도윤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여자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굳어갔다. 컵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기, 두 분 무슨 관계신지..." "관계? 도윤이 제일 잘 알아요. 매일 눌러대고 두드리고 그랬으니까." 소율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카페 안이 조용해졌다. 주변 테이블에서 시선이 하나둘 쏠렸다. 누군가는 웃음을 참는 듯 어깨를 떨었고,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기요, 손님." 카운터에서 직원이 다가왔다. 앞치마를 두른 손에는 물티슈가 들려 있었다. "다른 손님들도 계신데, 조금 조용히..." "어머, 죄송해요. 근데 도윤이 밤마다 어떻게 저를 만졌는지 얘기해드릴까요?" 소율의 목소리가 오히려 더 커졌다.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라 카페 구석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소율, 제발!" 도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터질 듯 붉었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끼익, 소리를 냈다. 손끝이 떨려왔다. '이대로 있으면 정말 큰일 나겠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당장이라도 땅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그냥 나갈게요." 도윤이 소율의 손목을 붙잡고 급히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손목을 잡은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어? 케이크 다 안 먹었는데." 소율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접시 위에는 아직 절반 넘게 케이크가 남아 있었다. 직원이 굳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다시는 안 오셔도 될 것 같아요." 정중하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결국 두 사람은 카페 밖으로 쫓겨나듯 나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도윤은 골목 구석에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이 셔츠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대체 왜 그런 말을 해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재밌잖아." 소율이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정말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제 저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지..." 도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콩쿠르 참가자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 게 뻔했다. '변태라고 생각하겠지. 아니, 그것보다 더 이상한 걸로...' 머릿속이 복잡해질수록 한숨만 깊어졌다. 그때였다. 소율이 갑자기 도윤의 팔을 붙잡았다. 소매가 살짝 걷어 올라갔다. 그의 시선이 순간 그 자리에 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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