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 피아노가 여자라니

3화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방 안을 가득 채웠던 흰빛이 실선처럼 좁아지더니, 마지막에는 소율의 몸 안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도윤은 그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눈앞에는 여전히 그 여자가 서 있었다. 갈색 장발, 눈썹 위에서 가지런히 잘린 앞머리, 파란 눈. 백색 블라우스에 줄무늬 스커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도윤의 시선이 그녀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방바닥을 딛고 서 있는 두 발. 숨을 쉬듯 오르내리는 어깨. 전부 사람의 것이었다. '저게... 진짜 사람이야?' "놀랐어?" 소율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붙은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이게 무슨...' 무릎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그대로 벽을 타고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엉덩이가 바닥에 닿는 순간, 차가운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는 듯했지만, 눈앞의 광경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괜찮아. 천천히 받아들여." 소율이 다가와 도윤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손을 뻗어 도윤의 뺨을 다시 쓸었다. 따뜻했다. 피아노일 리 없는 온도였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도윤의 뇌를 뒤흔들었다. '따뜻해. 진짜로 따뜻해.' "손... 왜 이렇게 따뜻해요." 도윤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 갈라진 목소리였다. "인간처럼 되면 인간처럼 굴어야 하니까." 소율이 웃었다. "체온도, 식사도, 다 가능해." 도윤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파란 눈동자 안에 자신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분명 소율이었다. 15년간 자신의 손끝을 받아준 그 낡은 피아노.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사람의 형태였다.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데, 가슴 한쪽에서는 이상하게도 익숙한 감각이 올라왔다. '거짓말이겠지. 아니면 내가 미친 거겠지.' "증명해봐요." 도윤이 겨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정말 소율이라면." 소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증명? 재밌겠네." 그녀는 손가락으로 도윤의 이마를 톡 두드렸다. 손끝이 스치는 순간, 도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다섯 살 때, 부모님이 널 데리고 악기점에 갔었지." 소율이 말을 시작했다. "넌 다른 피아노는 다 지나치고, 구석에 있던 낡은 업라이트 앞에 딱 멈춰 섰어." 도윤의 눈이 커졌다. 기억 저편에서 먼지 쌓인 장면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낮은 조명, 나무 냄새, 그리고 자신을 이끌던 작은 손. "그리고 물었지, '얘 이름은 뭐예요?'하고. 점원이 없다고 하니까 네가 직접 지어줬어." "소율..." "맞아. 그게 나야." 도윤의 숨이 턱 막혔다. '그걸 어떻게...' 부모님도 잊었을 법한 그 순간을, 그녀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기억이었다. "더 필요해?" 소율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열일곱 살 겨울, 네가 연습하다가 실수로 손을 다치고 밤새 혼자 울었던 것도 기억해." "그만해요." 도윤이 다급하게 손을 들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기 시작했다. "왜? 부끄러워?" 소율이 몸을 더 가까이 기울였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살결에서 옅은 나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열아홉 살 때 혼자 방에서 뭘 봤는지도 알아. 그때 어떤 소리를 냈는지도." 도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목덜미까지 열기가 번졌다. "그, 그건... 어떻게!" "15년 동안 한 방에 있었으니까." 소율이 어깨를 으쓱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네가 뭘 하든, 난 늘 거기 있었어." 도윤은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몰아쉬었다. '전부... 다 봤다는 거야?' 손끝이 떨려왔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으로 지나간 시간들이 빠르게 스쳐 갔다. 혼자라고 믿었던 순간들이, 사실은 전부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는 걸 깨닫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믿기 싫으면 안 믿어도 돼." 소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치맛자락이 살짝 흔들렸다. "근데 곧 믿게 될 거야." 그녀가 손을 뻗어 도윤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아귀의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사람의 손이라기엔 지나치게 단단했다. "뭐, 뭐 하려는 거예요." "보여줄게. 진짜로." 소율의 몸에서 다시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아까보다 약했지만, 방 안이 다시 밝아졌다. 빛의 색이 처음과는 조금 달랐다. 더 옅고, 더 부드러운 빛이었다. "어, 어어..."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소율의 형체가 서서히 흐려지며, 낯익은 나무 몸체의 실루엣이 겹쳐 보였다. 윤곽이 흔들리며 사람의 곡선과 피아노의 직선이 서로 뒤섞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빛이 완전히 걷히자, 방 한가운데에는 다시 낡은 영창 업라이트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소율은 사라졌다. 방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숨소리도, 목소리도 없었다. 오직 나무 몸체 특유의 냄새만이 방 안에 남아 있었다. 도윤은 얼어붙은 채 그 자리에 있는 피아노를 바라봤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건가?' 손을 뻗어 건반을 눌러보려던 순간, 다시 빛이 번쩍였다. 눈이 부셔서 저절로 눈을 감아야 했다. "놀랐지?" 어느새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소율이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란 눈동자 안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어려 있었지만, 도윤의 손끝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채로, 도윤은 그저 그녀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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