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번 생은 내가 설계한다

1화

혼약식 날 아침, 하녀들이 내 머리를 틀어 올리며 연신 예쁘다고 떠들었다. "아가씨, 오늘 정말 눈부시세요." "이 머리 장식이 딱이네요, 어쩜." '그러시겠지, 오늘 팔려 가는 물건인데 예쁘게 포장은 해야 할 거 아니야.' 나는 거울 속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열여덟 살, 강서아. 강대윤 공작가의 둘째이자 저주받은 딸. 원래는 다른 사람이었던 내가 이 몸으로 살게 된 지도 벌써 열 번째였다. 정확히는, 아홉 번 죽고 열 번째로 눈을 뜬 거였다. 매번 같은 날, 같은 열여덟 번째 생일에. 처음엔 억울했다. 두 번째는 화가 났다. 세 번째부터는 그냥 익숙해졌다. 익숙해진다는 게 이렇게 서글픈 일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하녀 하나가 머리핀을 떨어뜨리고는 허둥지둥 주우면서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 두려움과 동정이 반쯘 섞인, 뭔가 알고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얼굴. 지난 아홉 번의 삶에서 수도 없이 본 표정이었다. '또 시작이네.' 몇 번째였을까, 저 표정을 처음 본 게. 세 번째 삶이었나, 네 번째였나. 기억이 헷갈릴 정도로 자주 봤다는 게 웃기지도 않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 아닙니다, 아가씨." 대답이 너무 빨랐다. 거짓말할 때 나오는 전형적인 속도였다. '그렇게 빨리 대답하면 더 의심스럽다는 거, 아무도 안 가르쳐 줬나 봐.'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캐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아홉 번의 삶으로 배웠으니까. 하녀들은 늘 안다. 뭔가를, 조금이라도. 하지만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지켜야 할 목숨이 있으니까. 대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저택 정원에 마차 두 대가 도착해 있었다. 조씨 공작가의 문양이 박힌 마차였다. 오늘 혼약식의 신랑감, 조태현의 가문. 그리고 조태현의 동생들, 조민재와 조하늘도 함께 왔다는 뜻이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는 걸 창틀에 팔을 걸치고 지켜보았다. 익숙한 얼굴들, 익숙한 발걸음, 익숙한 웃음소리. '열 번째인데도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런가? 정말 그런가?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매번 다르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매번 다르게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같은 사람들, 같은 배경, 그러나 조금씩 어긋나는 대사와 행동들. 거울 속 내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완벽했다. 지나치게 완벽해서 오히려 부담스러운 미소였다. '오늘도 잘해보자, 강서아.' 응접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나는 발을 멈췄다. 계단 아래, 막 도착한 형제가 눈에 들어왔다. 조민재는 열여섯쯨 되었을까, 형과는 다르게 눈매가 순했다. 그 옆에서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꼬마가 조하늘, 일곱 살이었다. 둘 다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 위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마른침이 목 안쪽에서 넘어갔다. '또야.' 아홉 번의 삶 중 몇 번은 이 두 사람의 얼굴에서 똑같은 그림자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좋은 결말이 하나도 없었다. 세 번째 삶에서는 두 사람이 화재로 죽었다. 다섯 번째 삶에서는 마차 사고였다. 일곱 번째 삶에서는… 그건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너무 잔인했으니까.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손끝이 조금씩 떨려왔다. '괜찮아. 이번엔 다르게 해볼 거니까.' "강서아 아가씨." 조민재가 먼저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예의 바른 인사였다. "처음 뵙습니다. 형님의 혼약녀시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뵈니 반갑습니다." "저도 반가워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표면은 완벽하게 예의 바른 미소였다. '속으로는 니 형이 너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중이지만.' 조하늘이 형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누나, 예뻐요." "고마워." 나는 몸을 낮춰 아이의 눈높이에 맞췄다. 웃는 아이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왜였을까.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아홉 번의 삶 동안, 이런 서늘함이 틀린 적이 없었다는 것만은 안다. 아이의 작은 손을 한 번 잡아보았다. 따뜻했다. 살아있는 온기였다. '제발 이번엔 이 온기가 계속 남아있게 해줘.' 누구에게 비는 건지도 모르는 부탁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두 분, 혼약식 끝나고 저랑 얘기 좀 나눌래요?" 내 물음에 조민재가 조금 놀란 눈치를 보였다. "저희랑요?" "네. 친구가 되고 싶어서요." "왜요?" 조민재가 되물었다. 경계심 반, 호기심 반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냥요. 형의 동생분들이니까, 저랑도 가까워지면 좋잖아요." 거짓말이었다. 정확히는 절반의 거짓말이었다. 가까워지고 싶은 건 맞지만, '그냥'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조민재는 잠시 형의 뒷모습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기꺼이요." 조하늘이 옆에서 방긋 웃으며 손뼉을 쳤다. "저도요! 저도 누나랑 놀고 싶어요!" "그래, 그럼 이따 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과 나 사이의 거리를 좁혀야 했다. 왜냐하면 아홉 번의 삶 중, 이 두 사람이 살아남았던 삶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죽음의 이유는, 늘 같은 사람을 향해 있었다. 조태현. 큰형이자 나의 혼약자. 겉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공작가의 후계자. 하지만 아홉 번의 삶을 반복하며 알게 된 진짜 모습은, 완벽함 그 이면에 숨겨진 뭔가 다른 존재였다. 정확히 뭔지는 나도 아직 몰랐다. 다만 알고 있는 건, 그가 웃을 때마다 그의 동생들 목숨이 위태로워졌다는 것뿐이었다. '이번엔 반드시 알아내야 해.' 응접실 문 너머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혼약식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나는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혼약식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 나는 저택 복도에서 낯선 냄새를 느꼯다. 타는 냄새였다. 아주 희미했지만, 분명했다. '설마.'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코끝을 스치는 그 냄새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분명 시작될 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냄새가 짙어지고 있었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홉 번의 삶에서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던 그 냄새가, 오늘도 정확히 찾아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복도는 평소처럼 조용했고, 창밖으로는 화창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 냄새는 대체 어디서 나는 걸까. '설마, 벌써?' 이번엔 세 번째 삶보다 훨씬 빨랐다. 그때는 혼약식이 끝난 뒤에야 시작됐던 화재가, 지금은 시작되기도 전에 그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뭔가 달라졌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홉 번의 삶으로 배운 패턴이 오늘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다름이,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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