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타는 냄새는 복도 끝, 세탁실 쪽에서 옅어졌다가 다시 짙어졌다.
'또 헛다리네.'
나는 손끝으로 벽을 짚으며 코를 킁킁거렸다. 벽지는 매끄러웠다. 이 저택은 늘 이런 식이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다는 듯 반들거리면서, 안쪽에서는 뭔가가 조금씩 썩어가고 있었다.
3번째 삶에서 이 냄새를 처음 맡았을 때는 혼약식이 끝난 뒤였다. 지금은 시작하기도 전이다. 순서가 어긋났다는 건, 이번 삶이 지금까지의 아홉 번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좋은 신호는 아니지.'
나는 걸음을 옮기며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봤다. 첫 번째 삶에선 화재가 혼약식 다음 날. 두 번째는 그다음 주. 세 번째는 세 시간 뒤. 갈수록 앞으로 당겨졌다. 마치 누군가 재촉하듯이.
'설마 이번엔 시작 전이라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가씨, 여기 계셨어요?"
하녀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홉 번의 삶 동안 대여섯 번은 마주쳤을 얼굴. 이름은 매번 다르게 불렸지만 얼굴은 늘 같았다. 이 저택의 하인들은 그런 식으로 소모됐다. 이름은 잊혀도 얼굴은 남는, 부품 같은 존재들.
"타는 냄새가 나서요."
"그, 그건 부엌에서 요리 준비하느라..."
말끝이 흐려졌다.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짓말치고는 성의도 없네.'
부엌은 반대편이었다. 이 냄새가 부엌에서 났다면 나는 방향 감각을 잃은 게 틀림없다. 삶을 거듭 반복하면서도 그런 적은 없었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캐물어봐야 나올 게 없었다. 아홉 번의 경험이 가르쳐준 건 하나였다. 이 저택의 하인들은 두려움 앞에서 입을 다물지,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
'누구 밑에서 부리는 사람인지가 문제지.'
하녀의 눈동자가 힐끔 응접실 방향을 향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짧은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아홉 번의 삶 동안 배웠다.
혼약식장으로 향하는 복도는 화려했다. 붉은 카펫, 금박을 두른 촛대,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나를 내려다봤다. 초상화 속 인물들은 죄다 표정이 딱딱했다. 웃는 법을 잊은 사람들처럼.
'저 얼굴들 중 몇이나 나처럼 몇 번씩 죽어봤을까.'
생각해봐야 답 없는 질문이었다. 그래도 습관처럼 떠올랐다. 반복되는 삶이 남긴 부작용이라면 이런 것이었다.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지 못한 채 넘어가는 습관.
카펫을 밟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숨을 한 번 짧게 내쉬고 응접실 문 앞에 섰다.
'가야지. 아홉 번이나 갔던 곳인데 뭐가 새삼스럽다고.'
새삼스러웠다. 순서가 어긋난 삶은 처음이니까.
응접실 문을 열자 조태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짙은 남색 예복을 걸친 그는 여느 때처럼 표정이 없었다. 무표정이 아니라, 표정을 짓는 법을 아예 모르는 것 같은 얼굴.
"오셨습니까."
그가 말했다. 존댓말이었지만 온기가 하나도 없었다.
"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더 길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해줄까. 이 개쉐이야.'
속으로만 뱉는 말이었다. 겉으로는 여느 때처럼 무표정을 유지했다. 죽음을 거듭 겪어본 사람에게 표정 관리쯤은 숨쉬기와 비슷했다.
조민재가 내 눈치를 살피며 슬쩍 다가왔다.
"저, 서아 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없었다. 이 애가 이 삶에서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불안했다. 지금까지 아홉 번, 조민재와 조하늘은 혼약식 이후 어느 시점에서 죽었다. 화재로, 마차 사고로, 혹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방식으로. 그리고 그 죽음의 뒤편엔 항상 조태현이 서 있었다.
조민재는 조태현의 동생이었다. 형과 달리 눈빛에 온기가 있었다. 그 온기가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집안에서 온기를 가진 사람은 오래 살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엔 순서가 바뀌었다. 냄새가 벌써 난다.'
조하늘이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누나, 오늘 재밌는 거 해요?"
조하늘은 조민재의 막내 동생이었다. 아직 열 살도 안 된 아이. 아홉 번의 삶 중 몇 번은 이 아이가 웃는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삶이 끝났다. 이번 삶에선 아직 웃고 있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글쎄, 잘 모르겠네."
나는 웃어 보였다. 웃는 얼굴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웃음 뒤에 숨긴 계산이 문제였다. 이 아이가 오늘 살아남을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될까, 하는 계산.
'그런 계산이나 하고 있으니 내가 사람인지 계산기인지 모르겠다.'
강대윤 공작이 상석에 앉았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사람. 그러나 아홉 번의 삶 동안 그가 나를 딸로 대한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오히려 손에 꼽을 정도의 순간들조차 계산속에서 나온 다정함이었다.
"시작하지."
그가 짧게 말했다.
명령이었다. 이 응접실 안에서 명령형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하나뿐이었다.
혼약식은 형식적인 절차의 연속이었다. 사제가 성서를 읽고, 두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반지가 교환되고, 서약문이 낭독됐다. 나는 그 모든 순서를 이미 아홉 번 겪은 사람처럼—사실 그랬으니까—무감각하게 따라갔다.
사제의 목소리는 낮고 단조로웠다. 성서 구절이 이어질 때마다 촛불이 흔들렸다. 반지가 손가락에 끼워지는 순간의 차가운 감촉도, 서약문의 첫 줄이 낭독되는 순간의 정적도 전부 아홉 번 반복된 것들이었다.
'열 번째쯤 되니까 이제 지겹기까지 하네.'
조태현이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얼음처럼.
'이 손에 몇이나 죽었을까.'
세어보려다 그만두었다. 어차피 답을 알아도 달라질 게 없었다. 이번 삶에서 저 손이 무슨 짓을 할지가 문제였다.
서약문의 마지막 줄을 읽으려는 순간,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타는 냄새였다. 아까 복도에서 맡았던 것보다 훨씬 짙었다.
"...?"
사제가 성서를 읽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응접실 문 밖에서 연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처음엔 실낱같았다가, 순식간에 뭉텅뭉텅 밀려들었다.
"불이야!"
누군가 외쳤다. 순식간에 응접실이 소란해졌다. 촛대가 넘어지고, 커튼에 불이 옮겨붙는 소리가 들렸다.
타닥, 타다닥.
불이 커튼을 삼키는 소리는 생각보다 경쾌했다. 어울리지 않게.
'벌써?'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3번째 삶의 화재는 혼약식이 끝난 지 세 시간 뒤에 일어났다. 이번엔 서약문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홉 번의 경험이 순서대로 재생됐다. 화재가 시작되면 응접실 문 쪽이 먼저 막힌다. 창문 쪽은 그나마 늦게 불이 번진다. 하지만 이번엔 창문 밖으로도 이미 불길이 보였다.
'순서가 바뀌었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서아 님!"
조민재가 조하늘의 손을 잡고 내 쪽으로 달려왔다. 응접실 창문 밖으로 불길이 이미 저택 벽을 타고 오르는 게 보였다.
연기가 눈을 찔렀다. 시야가 흔들렸다.
기침이 터졌다. 목구멍이 타는 듯했다. 사람들의 비명과 발소리가 뒤엉켰다.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 유리가 깨지는 소리,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열기.
'또 이렇게 죽는 건가.'
나는 조하늘의 팔을 붙잡았다. 아이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도 떨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감각이 온통 연기와 열기에 먹혀버린 상태였다.
'열 번째는 좀 다르게 죽어보고 싶었는데.'
이런 순간에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조태현을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불길 속에서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그 무표정이 오늘따라 유난히 소름 끼쳤다.
'저 얼굴, 저 손. 설마 이번에도-'
다음 순간, 응접실 천장 일부가 무너지며 불덩이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