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응접실 문을 열자 냄새는 씻은 듯 사라졌다.
'착각인가.'
그럴 리가.
삶을 거듭 반복하면서도 헛것을 냄새로 착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살아온 삶의 숫자만큼 죽어온 방식도 다양했다. 불에 타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목이 졸려 죽고. 그 모든 죽음 앞에서 내 코는 언제나 정직했다. 타는 냄새가 나면 진짜로 불이 났다는 뜻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방 안을 눈으로 훑었다. 벽난로 뒤쪽 목재 벽. 오늘도 그대로였다. 낡고 오래된, 결이 갈라진 나무. 저 벽 뒤에서 시작된 불길에 몸이 타들어갔던 삶이 몇 번이었더라. 세 번? 네 번? 세다가 포기했다.
어젯밤, 나는 몰래 하녀 한 명을 시켜 벽난로 근처에 물동이 세 개를 놓아두었다. 서재로 통하는 복도 창문의 걸쇠도 풀어두었고, 정원으로 이어지는 뒷문의 자물쇠도 미리 열어두었다.
'이 정도면 어디로든 도망칠 구멍은 만들어놨다.'
하녀는 내가 시킨 일을 하면서 몇 번이나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아가씨, 왜 물동이를 벽난로 옆에 놔두라 하십니까. 이유는 말할 수 없었다. 아홉 번째 삶에서 벽난로 불이 옮겨붙어 응접실 전체가 타버렸다는 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너 목숨도 걸려 있는 거야, 이 멍청아.'
혼약식은 예정대로 시작됐다.
아버지가 상석에서 짧게 말했다.
"시작하지."
늘 저런 식이었다. 딸의 혼약식인데도 감정 한 톨 섞이지 않은 목소리. 아버지는 나를 딸이 아니라 가문의 자산으로 취급했다. 이번 생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서약문을 읽는 사제의 목소리가 낭독을 시작했다. 조태현이 내 옆에 섰다. 그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온도가 없는 손이었다.
'또 이 손이네.'
몇 번의 삶을 거치며 이 손을 몇 번이나 잡았는지 모르겠다. 차갑고, 건조하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손. 이 손에 목이 졸려 죽었던 삶도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손을 다시 잡고 있어야 한다니.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
"강서아는 조태현을 남편으로 맞을 것을 서약합니까."
대답을 하려는 순간, 조태현이 낮게 속삭였다.
"이번엔 도망 못 가실 겁니다."
등골이 서늘했다.
'뭐야, 저 인간 뭘 알고 하는 말이야.'
목소리를 낮춰 되물으려 했지만 사제의 시선이 이미 나를 향해 있었다. 지금 말을 걸었다간 이상한 사람이 될 판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눈동자만 굴려 조태현의 옆얼굴을 살폈다.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는 얼굴. 저 얼굴 뒤에 뭐가 들어있는지 여덕 번의 삶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알아낸 적이 없었다.
"서약합니다."
나는 목소리 하나 흔들리지 않고 답했다.
서약문이 끝나갈 무렵, 시선을 슬쩍 돌려 응접실 뒤편을 확인했다. 물동이는 그대로 있었다. 벽난로 불씨도 잘 관리되고 있었다. 하녀들이 부지런히 장작을 넣고 있었고, 불길은 딱 필요한 만큼만 타올랐다.
'설마 오늘은 안 나는 건가.'
기대와 의심이 동시에 들었다. 지금까지 매번 응접실에서 시작된 불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이번 생은 다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식이 끝났다. 화재는 없었다.
안도감이 든 것도 잠시, 나는 곧 다른 계획을 세웠다.
식이 끝난 밤, 저택이 잠든 시간에 몸을 빼기로 했다.
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축하한다며 다가올 때마다 나는 웃는 얼굴을 유지하느라 애를 먹었다. 입꼬리가 뻐근해질 정도로. 조태현의 친척이라는 사람들, 아버지의 사업 파트너들,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계속 말을 걸었다.
'축하는 무슨. 이 결혼 끝나기 전에 나 죽을지도 모르는데.'
겉으로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를 반복하면서도 속으로는 탈출 경로를 다시 그리고 있었다. 밤 열두 시, 하녀들 교대 시간, 뒷문까지의 거리, 담장 높이.
밤 열두 시. 하녀들이 잠든 시간에 나는 뒷문으로 향했다.
분명 자물쇠를 풀어놓았는데, 문은 잠겨 있었다.
'뭐야. 누가 다시 잠갔어.'
손잡이를 몇 번이나 흔들어보았다. 딸그락, 딸그락. 소리만 날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자물쇠를 억지로 뜯어보려던 손끝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서재 창문도 마찬가지였다. 걸쇠는 다시 걸려 있었다. 창틀 아래를 손톱으로 긁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누군가가 내 계획을 정확히 알고, 정확히 되돌려놓은 것처럼.
'귀신같네. 아니, 귀신보다 더 무섭다.'
정원으로 나가는 다른 길을 찾아 저택 뒤편으로 돌아갔다. 담장 아래, 예전 삶에서 넘어본 적 있는 낮은 돌담이 있었다. 그 돌담을 넘으면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는 걸 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섯 번째 삶에서 딱 한 번, 저 길로 도망쳐서 사흘을 버틴 적이 있었다. 결국 잡혀서 더 끔찍하게 죽었지만.
그 앞에 다다랐을 때, 어둠 속에서 사람 형체가 보였다.
"어딜 가십니까."
조태현이었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하필 이 인간이.'
달빛도 없는 밤이었는데 그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보였다. 무표정한,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는 얼굴. 나는 순간적으로 웃음을 지으며 태연한 척을 했다.
"산책 중이었습니다."
"이 시간에요."
그의 목소리엔 여전히 온도가 없었다.
"돌아가시죠. 아버님이 아시면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명령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나는 그의 뒤편으로 보이는 돌담을 곁눈질로 한 번 더 확인했다. 저 담을 넘으면 자유였다. 하지만 지금 저 담을 향해 뛰어봤자 몇 걸음 못 가서 붙잡힐 게 뻔했다.
'저 인간 진짜 뭐야. 어떻게 딱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다시 걸음을 돌렸다.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 조태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서 있을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움직임 하나 없이.
방으로 돌아온 뒤, 나는 침대에 앉아 오랫동안 생각했다.
뒷문의 자물쇠, 서재의 걸쇠, 그리고 담장 앞의 조태현.
이 저택은, 내가 도망치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사람이, 아니면 저 인간이, 다 알고 막은 거야.'
우연이 세 번 겹치면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자물쇠는 내가 직접 풀어놓은 거였다. 걸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누군가 그걸 다시 걸어놨다. 그리고 담장 앞에는 정확히 조태현이 서 있었다. 이 모든 게 우연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제로에 가깝겠지.'
아홉 번의 삶 동안 나는 늘 죽음의 방식을 바꾸려 했다. 도망치려 했고, 아버지에게 매달렸고, 사제에게 하소연했다.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이번에도 같았다.
'그래, 알았어. 여기서 못 나가.'
나는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운명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접기로 했다.
대신, 이번 삶에서 끝까지 살아남겠다.
조태현의 손아귀에서,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 이 저주받은 저택 안에서.
살아남는 것. 그게 이번 삶의 유일한 목표였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좋아, 그럼 이제 뭘 해야 하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 저택 안의 모든 관계를 다시 그려야 했다. 누구를 내 편으로 만들고, 누구를 경계하고, 누구를 이용할지. 하녀들 중 누가 입이 무거운지, 정원사가 어느 시간대에 자리를 비우는지, 아버지의 서재에 어떤 문서들이 있는지. 여덜 번의 삶에서 놓쳤던 것들을 이번엔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조태현. 저 인간부터 파악해야 해. 저 인간이 뭘 알고 있는 건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그가 매번 저주의 결말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자리에 서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냥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정확했다.
창문을 닫으려던 순간, 정원 쪽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짐승의 소리였다.
작고, 다급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