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친이 수상해졌다

1화

아침 공기가 차가웠다. 입김이 하얗게 퍼졌다가 사라졌다. 서은이 내 옆에서 걷고 있었다. 가방끈을 양손으로 꼭 붙잡은 채, 나란히 걸음을 맞추면서. "오늘 급식 뭐야?" 서은이 물었다. "몰라. 안 봤어." "넌 항상 그래." 서은이 웃으며 내 팔을 툭 쳤다. 그 웃음이 예뻤다. 초등학교 때부터 봐온 얼굴인데도 매일 아침 새삼스러웠다. 몇 년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얼굴이 있다면, 나한테는 서은이 그랬다. - "우리 나중에 결혼하자." 중학생이었던 서은이 아무렇지 않게 했던 말. 나는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서은은 아마 기억도 안 할 거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오래 붙잡고 있는 걸까. 골목을 돌던 참이었다. 서은의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이 아니라 벨소리였다. 익숙한 멜로디였는데, 처음 듣는 것처럼 서은이 화들짝 놀랐다. 서은이 화면을 보더니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몇 걸음 떨어졌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괜히 하늘을 봤다. 안 보는 척, 안 듣는 척. "어, 지금은 안 돼." 목소리가 낮았다. 평소보다 빨랐다. "나중에 얘기해. 지금 통화 못 해." 딸깍, 전화를 끊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뭐지.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지.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서은이 다시 내 옆으로 왔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 손이 조금 급했다. "누구야?" "아, 그냥. 학원 쪽." 서은이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했다. 학원 쪽이라니. 서은은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서은이 다닌 학원은 딱 한 번, 그것도 한 달 만에 그만둔 피아노 학원뿐이었다. 말할까. 말아야지. 괜히 아침부터 분위기 망치기 싫었다. 그냥 넘기자.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근데 자꾸 딸깍, 하는 소리가 귓가에 남았다. 평소보다 빠르게 끊긴, 그 짧은 소리가. *** 교실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애들이 삼삼오오 모여 뭔가를 수군거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다들 자리에 앉아 휴대폰만 보고 있을 시간인데, 오늘은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전학생 온대." 박현우가 내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진짜?" "미국에서 왔다던데. 여자." 현우 눈이 반짝였다. "넌 왜 이렇게 신났어." "야, 전학생 온다는데 안 신나는 놈이 있냐." 현우가 히죽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문이 열렸다. 한소영 선생님이 들어왔다. 평소보다 조금 들뜬 걸음걸이였다. "자, 오늘부터 우리 반에 새로운 친구가 옵니다." 선생님이 칠판 앞에 서서 말했다. 뒤이어 한 여학생이 들어왔다.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밝은 갈색이었다. 교복이 아직 낯선 듯 소매를 두 번쯤 접어 올린 채였다. "안녕하세요. 로라 정이라고 합니다." 또렷한 발음이었다. 영어 억양이 살짝 섞여 있었다. 애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는 작게 감탄사를 흘렸고, 누군가는 옆 사람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서은은 창가 자리에서 별 반응 없이 앉아 있었다. 턱을 괸 채로, 창밖을 보는 것도 아니고 로라를 보는 것도 아닌, 애매한 시선으로. 선생님이 나를 향해 손짓했다. "강도윤." "네?" "네가 로라 학생 안내 좀 해줄래? 학교 시설이랑 규칙 같은 거." 반 전체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이런 시선,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제가요?" "평소에 성실하잖아. 부탁할게." 선생님이 웃으며 내 머리를 살짝 쓸었다. 그 손짓이 익숙했다. 어릴 때부터 그래왔으니까. 선생님은 우리 집이랑도 친해서 나를 동생처럼 대했다. 엄마 친구의 동생, 그런 애매한 관계였는데도 선생님은 늘 나를 조카처럼 대했다. "알겠습니다." 대답하면서 슬쩍 서은을 봤다. 서은의 표정이 이상했다. 웃고 있었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입꼬리만 올라간 채로, 눈동자는 어딘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그 표정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서은이 저런 얼굴을 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서은이 내 자리로 왔다. 책상에 손을 짚고, 몸을 살짝 기울인 채. "너가 안내한다고?" "어, 선생님이 시켰어." "거절하지 그랬어." 서은 목소리가 낮았다. "그게 거절할 일이야?" "싫으니까." 서은이 팔짱을 꼈다.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평소 서은답지 않았다. 서은은 원래 이런 일로 목소리를 높이는 애가 아니었다. "그냥 안내만 해주는 거야. 별거 아니잖아." "별거 아니면 안 해도 되잖아." 말이 자꾸 겉돌았다. 서은이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뭐라고 더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때 로라 정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걸음걸이가 당당했다. 낯선 교실인데도 위축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저기, 강도윤 학생?" 서은의 눈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 짧은 순간에 서은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네, 저예요." "잘 부탁해요." 로라가 손을 내밀며 웃었다. 나는 얼떨결에 손을 잡았다. 손이 생각보다 차가웠다. 서은이 그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등 뒤에서 서은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느리고 무거운, 참는 듯한 숨.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스쳤다. 아침의 그 딸깍 소리와, 지금 이 순간의 서은의 눈빛이 자꾸 겹쳐졌다. 둘 다 나한테는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로라가 내 손을 놓고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서은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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