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월요일 아침, 로라가 먼저 나를 붙잡았다.
교실 문 앞이었다. 가방을 어깨에 걸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앞을 막아서니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났다.
"강도윤 학생, 오늘 시간 있어요?"
"네, 왜요?"
"미술실 위치를 아직 몰라서요."
목소리에 억양이 살짝 남아 있었다. 로라는 이번 학기에 전학 온 학생이었다. 아직 학교 구조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알겠어요. 같이 가요."
대답하고 나서야 아침 자율학습 시작 전 5분이라는 걸 깨달았다. 뭐, 어차피 가는 방향이 비슷하니까.
복도를 걷는데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따끔했다.
등 뒤에 뭔가 붙은 것처럼.
돌아보니 서은이 교실 문 앞에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화가 났으면 화를 냈으면 좋겠는데.
아무 표정도 없이 그냥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눈빛이 오히려 심장을 조였다.
"저기 서은이가..."
말을 꺼내다 말았다.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요."
로라가 앞장서서 걸었다. 걸음이 가벼웠다. 저 사람은 지금 이 복도의 온도를 전혀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실 앞에 도착했을 때 로라가 갑자기 물었다.
"강도윤 학생, 피아노 쳐요?"
"어떻게 알았어요?"
"복도에 붙은 발표회 명단에 이름 있던데요."
맞다.
다음 주에 학년 발표회가 있었다.
나는 작곡한 곡을 치기로 되어 있었다.
솔직히 명단이 붙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그냥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긴장돼요?"
"조금이요."
조금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많이였다. 곡을 완성한 지 얼마 안 됐고, 아직 손에 완전히 붙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저도 보러 가도 돼요?"
로라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눈이 진짜 반짝였다.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 잠깐 당황했다.
"네, 뭐, 공개니까요."
대답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서은이 이 대화를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머릿속에서 아까 그 무표정한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미술실 문을 열어주고 돌아서는데도 그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
방과 후 음악실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자꾸 엉켰다.
같은 마디를 벌써 열 번은 넘게 쳤는데 왼손이 계속 반박자씩 늦었다. 짜증이 나서 건반을 손바닥으로 툭 쳤다.
쿵.
"그 부분, 왼손이 좀 늦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랐다.
한소영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연습 열심히 하네."
선생님이 피아노 옆에 앉았다.
의자가 좁아서 어깨가 살짝 닿았다. 익숙한 향수 냄새가 났다.
"떨려서요."
"긴장 안 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선생님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쓸었다.
익숙한 손짓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위로하는 손길 같았다.
"다시 쳐봐. 이번엔 왼손만 생각하고."
시키는 대로 왼손만 신경 쓰며 다시 쳤다. 조금 나아졌다.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봤지? 별거 아니야."
"요즘 서은이랑 별일 없어?"
선생님이 갑자기 물었다.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멈췄다.
"왜요?"
"그냥,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별일 없어요."
거짓말을 했다.
선생님이 잠깐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이 뭔가를 꿰뚫어보는 것 같아서 나는 애써 시선을 피아노 건반으로 돌렸다.
"도윤아, 너무 참지 마."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뭘 참지 말라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툭 치고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도 나는 한참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가 다시 내렸다.
참지 말라는 게 뭘까.
서은한테 물어봐야 할 게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서은이 나한테 뭔가 참고 있다는 뜻일까.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져서 결국 그냥 다시 건반을 눌렀다. 소리라도 내야 이 침묵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서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쯤 울리고 나서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낮았다.
"어디야?"
"집에 가는 중."
"나 지금 갈까?"
"아니, 오늘은 좀 피곤해."
서은의 목소리가 힘없었다.
평소라면 오라고 했을 텐데. 뭔가 이상했다.
"무슨 일 있어?"
"없어. 그냥."
말끝이 흐려졌다.
뭔가 있다는 게 뻔했다.
수화기 너머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서은도 걷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짜 없는 거지?"
"응, 없어."
짧은 침묵이 흘렀다.
전화기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라도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도윤아."
"어."
"나 떠나면 안 돼."
갑작스러운 말에 손이 차가워졌다.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길 한복판에 서서 나는 그 말을 다시 곱씹었다.
"왜 그런 말을 해?"
"그냥,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떨렸다.
"안 떠나. 걱정 마."
"약속해."
"약속해."
전화를 끊고도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은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걸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결국 걷기 시작했다. 서은은 지금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걸까. 한소영 선생님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너무 참지 마. 그 말과 서은의 말이 자꾸 겹쳐졌다.
집에 가니 도현이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 늦었네."
"연습하다가."
"엄마가 밥 차려놨어."
도현이가 신발을 벗는 나를 유심히 쳐다봤다.
"형 표정이 왜 그래?"
"뭐가."
"그냥, 죽상이야."
"밥이나 먹자."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데 어머니가 조용히 나를 지켜봤다.
숟가락질하는 손이 신경 쓰였다. 밥알을 씹으면서도 계속 어머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슨 일 있니?"
"아니요, 없어요."
어머니의 눈빛이 오래 머물렀다.
뭔가 아는 사람의 눈빛 같았다.
도현이가 옆에서 밥을 먹으며 슬쩍 눈치를 봤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둘 다 왜 그래, 무섭게."
도현이가 괜히 웃으며 분위기를 풀려 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려서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한 잔 마셨다. 목구멍이 답답했다. 서은의 말, 선생님의 말, 어머니의 시선. 전부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나만 모르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켰다가 다시 껐다.
서은에게 다시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 떠나면 안 돼.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서은이 정말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어느 쪽이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잠들기 전까지 나는 계속 그 목소리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