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발표회 날이었다.
강당에 학생들이 가득했다.
의자 삐걱대는 소리, 프로그램 팸플릿 넘기는 소리, 낮게 웅웅거리는 말소리들이 뒤섞여 강당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대 뒤에서 손끝이 떨렸다.
숨이 자꾸 얕아졌다.
크게 숨을 들이쉬어봤다. 그런데도 가슴 안쪽이 계속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이게 그냥 긴장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인가. 생각할수록 더 답이 안 나왔다.
"괜찮아?"
현우가 어깨를 두드렸다.
"그럭저럭."
"얼굴이 완전 백지장인데 그럭저럭이라니. 너 지금 손도 떨고 있잖아."
"티나?"
"티나다 못해 아주 대놓고 티나."
현우가 픽 웃으며 내 등을 툭 밀었다.
"서은이 왔어. 저기 앞줄."
그 말에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서은이 정말 앞줄에 앉아 있었다.
표정이 딱딱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표정만 봐서는 짐작조차 안 됐다.
그 옆에는 로라도 있었다.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이상하게 낯설었다.
둘이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걸까. 뭔가 나만 모르는 이야기가 그 사이에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살짝 불편해졌다.
"강도윤 학생, 다음 순서입니다."
선생님이 무대 옆에서 손짓했다.
발이 무거웠다. 한 걸음씩 걸어가는데 그 짧은 거리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조명이 눈을 찔렀다.
눈이 부셔서 잠깐 앞이 하얗게 변했다. 강당 안 사람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뭉개져 보였다.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손끝이 차가웠다.
이 손으로 제대로 칠 수 있을까. 순간 그런 의심이 스쳤다.
첫 음을 눌렀다.
그 순간 잡생각이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첫 음이 울리는 순간 강당도, 사람들의 시선도, 떨리던 손끝도 다 사라지고 오직 건반과 나만 남았다.
곡은 내가 작곡한 것이었다.
서은을 생각하며 만든 곡이었다.
멜로디의 어느 부분은 서은이 웃을 때의 느낌을 담았고, 다른 부분은 서은이 말없이 창밖을 볼 때의 느낌을 담았다. 그 애가 알아챌지 모르겠지만.
연주하는 동안 서은의 얼굴이 조금씩 풀리는 게 보였다.
눈이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손끝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이 곡을 만들 때의 마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음을 누르자 강당이 조용해졌다.
그러다 박수가 터졌다.
짝짝짝, 짝짝짝.
박수 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 속에서 딱 한 사람의 얼굴만 눈에 들어왔다.
무대를 내려오자 로라가 먼저 다가왔다.
"진짜 좋았어요. 눈물 날 것 같았어요."
로라가 눈가를 손끝으로 닦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진심이에요. 곡 제목이 뭐예요?"
"아직 안 정했어요."
"어울리는 제목 생각나면 저한테도 알려주세요."
서은이 그 뒤에 서 있었다.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서은아."
"...잘했어."
짧은 대답이었다.
웃지 않았다.
그 무표정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방금까지 눈이 젖어 있던 애가 왜 이렇게 표정을 지웠을까.
로라가 눈치를 채고 슬쩍 자리를 비켰다.
"두 사람 얘기 나눠요. 저는 저기 선생님한테 인사 좀 드리고 올게요."
로라가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도 되잖아."
"고마워, 진짜로."
서은이 그제야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조금 슬프게 보였다.
왜 그렇게 보였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은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
"곡 진짜 좋았어. 누구 생각하면서 만든 거야?"
"...그건 비밀."
"치사하게."
서은이 살짝 눈을 흘겼다. 그 순간만큼은 평소 그 애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
행사가 끝나고 청소를 도우러 강당 뒤편으로 갔다.
김만수 아저씨가 의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도윤이 연주 잘했더라."
"아저씨도 보셨어요?"
"당연하지. 맨 뒷줄에서 봤다. 손끝 떠는 거까지 다 보였어."
아저씨가 껄껄 웃으며 의자를 옮겼다.
"그거 그렇게 티가 났어요?"
"티가 나긴 했는데 그래도 잘 쳤어. 연습 많이 했나 보더라."
"저번에 빌려준 책 얘기도 하려고 왔지."
아저씨가 의자 하나를 더 겹쳐 쌓으며 말했다.
"그 책, 다 읽었어요?"
"어, 재밌더라. 근데 결말이 좀 씁쓸해."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마지막 장 넘기고 한참 멍했어요."
"그치, 그치. 그게 좋은 책이야. 사람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놔야지."
아저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의자 정리를 도우면서 무거운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근데 도윤아."
"네?"
"요즘 여자친구 표정이 좀 그렇더라."
아저씨도 눈치챈 걸까.
손끝이 다시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런가요?"
"내가 오래 살아서 그런지 사람 표정 보면 알아. 뭔가 숨기는 얼굴이야."
그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
"괜찮을 거예요."
대답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그래, 괜찮아야지. 근데 혹시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도 말해. 늙은이라도 들어줄 귀는 있다."
아저씨가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그 웃음이 고맙기도 하고, 동시에 무겁기도 했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소영 선생님과 우연히 마주쳤다.
가로등 아래 서 있던 선생님이 먼저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연주 좋았어."
"감사합니다."
"진짜 소질 있는 것 같아. 어릴 때부터 알았지만."
선생님이 걸음을 맞춰 걸었다.
나란히 걷는 길,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선생님."
"응?"
"저번에 참지 말라고 하신 거, 무슨 뜻이었어요?"
선생님이 잠깐 걸음을 멈췄다.
그 짧은 정지가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그냥, 힘든 일 있으면 말하라는 뜻이었어."
대답이 어딘가 얼버무리는 느낌이었다.
"진짜 그것뿐이에요?"
"그럼 뭐가 더 있겠어."
선생님이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그 웃음 뒤에 뭔가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선생님, 혹시 서은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냥, 요즘 표정이 안 좋아서요."
선생님이 잠깐 나를 바라봤다. 뭔가 말하려다 마는 표정이었다.
"별일 없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말도 어딘가 확신이 없었다.
선생님과 헤어지고 혼자 걷는 길, 밤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집 앞에 도착하니 거실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어머니 목소리가 낮게 들려오고 있었다.
전화 통화 중인 듯했다.
현관문을 열려다 손을 멈췄다.
무슨 얘기를 하고 계신 걸까.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낮고 조심스러웠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