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던전에 쉼터 차렸습니다

1화

오전 8시 42분. 지하철 2호선은 만원이었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 창밖을 봤다. 창밖은 어두운 터널뿐이었다. 7년째 같은 시간, 같은 칸이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어깨와 어깨가 부딪혔다. 누군가의 가방이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냥 손잡이를 조금 더 세게 쥐었을 뿐이다. 창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피곤한 눈, 다크서클, 다림질하지 못한 셔츠 깃. 7년 전에도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는 표정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지금은 그 차이가 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한빛상사 영업2팀. 내 책상은 창가에서 세 번째였다. 컴퓨터를 켰다. 부팅 화면이 뜨는 동안 나는 습관처럼 목을 꺾었다. 우두둑, 소리가 났다. 메일함에 붉은 숫자가 떠 있었다. [미확인 47] 나는 한숨을 쉬었다. 47개의 메일 중 몇 개는 이미 제목만 봐도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긴급] [재확인 요청] [클레임] 익숙한 단어들이었다. 익숙해서 더 지긋지긋한 단어들이었다. "선배님." 오하늘이 내 자리로 뛰어왔다. 손에는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 숨이 조금 가빴다. 계단으로 뛰어온 모양이었다. "철근 가격 보셨어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왜, 또 올랐어?" "아니요." 하늘이 화면을 내밀었다. 빨간 그래프가 수직으로 꺾여 있었다. [HRC 국내 유통가 -14.2%] [월요일 오전 개장 직후] 숨이 턱 막혔다. 14퍼센트. 하루 만에. 나는 다시 한번 숫자를 확인했다.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그래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빨간 선은 바닥까지 곤두박질쳐 있었다. "중국 쪽 재고가 갑자기 풀렸대요." 하늘이 말을 이었다. "거래처들 전부 난리예요."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부재중 전화 열둘. 모두 거래처였다. 화면에 뜬 번호들을 하나씩 눈으로 훑었다. 동일철강, 대성건자재, 우리개발. 전부 지난 3년간 내가 직접 관리해온 곳들이었다. 그들의 목소리 톤까지 예상이 됐다. 오전 9시 03분. 첫 통화가 시작됐다. "강 대리,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상대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파악 중입니다." "파악은 무슨, 지금 손해가 얼만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후까지 정리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빨리 해."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음 전화가 곧바로 울렸다. 받기도 전에 이미 알 수 있었다. 비슷한 대사, 비슷한 분노. 같은 대화가 열두 번 반복됐다. 같은 사과, 같은 변명, 같은 침묵. 어떤 사람은 소리를 질렀고, 어떤 사람은 차갑게 말을 끊었다. 그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강 대리, 우리 이번 건 아예 계약 취소할까 고민 중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재검토 부탁드립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오전이 통째로 그렇게 지나갔다. 시계를 봤을 때는 이미 11시 50분이었다. 메일함 숫자는 오히려 늘어 있었다. [미확인 61] 나는 그 숫자를 보다가 화면을 꺼버렸다. 점심시간, 나는 옥상에 올라갔다. 담배는 피우지 않았다. 그냥 바람을 쐬고 싶었다. 옥상 난간에 팔을 걸치고 도심을 내려다봤다. 차들이 줄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저 아래 어딘가에서도 나 같은 사람이 전화기를 붙잡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위로는 되지 않았다. 7년 전이 떠올랐다. 입사 첫해, 나는 현장을 돌았다. 철근 야적장, 콘크리트 타설 현장. 먼지와 소음 속에서 숫자를 확인했다. 손끝에 닿는 철근의 냉기. 그게 진짜였다. 그때는 장갑을 껴도 손이 시렸다. 쇳가루가 목 안까지 들어와 캑캑거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 현장에 서 있으면 뭔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숫자 뒤에 실체가 있다는 감각. 지금은 그 감각이 없다. 지금 나는 숫자만 본다. 화면 속의 숫자.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 현장은 없었다. "선배님, 여기 계셨네요." 하늘이 옥상으로 올라왔다. 손에 캔커피 두 개를 들고 있었다. 하나를 건넸다. 캔이 차가웠다. 손바닥에 냉기가 스몄다. 오랜만에 느끼는, 숫자가 아닌 감각이었다. "괜찮으세요?" "뭐가." "오늘 좀 힘들어 보이셔서." 나는 캔을 땄다. 탄산이 튀는 소리가 났다. "괜찮아." 하늘이 옆에 앉았다. 난간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 해요." "무슨 생각." "우리가 파는 게 뭔지도 모르고 파는 거 아닌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캔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고 달았다. 그 맛이 오늘 하루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선배님은 주말마다 던전 가시잖아요." "그래." "거긴 진짜죠? 현장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계던전. 서울 근교, 지하철로 40분. 난이도 최하급 던전. 주말마다 나는 그곳에 갔다. 해체 스킬 하나로. 거기서는 적어도 눈앞의 몬스터가 진짜였다. 쓰러뜨리면 사체가 남았다. 사체를 분해하면 부산물이 나왔다. 과정이 눈에 보였다. 사무실의 숫자와는 달랐다. "저도 스킬 하나 얻고 싶어요." 하늘이 캔을 만지작거렸다. "저는 아직 무각성자예요." 나는 웃었다. "나도 별거 없어." 해체. 물건을 분해하는 스킬. 등급은 F. 각성자 중 최약체로 분류되는 스킬이었다. 던전에서 쓸모라곤 몬스터 사체를 분해해 부산물을 얻는 것뿐. 그마저도 다른 각성자들은 더 빠르고 정교하게 했다. 같은 F급 스킬을 가진 각성자들 사이에서도 나는 하위권이었다. 분해 속도, 부산물 순도, 전부 평균 이하였다. 길드에서도 나 같은 사람은 잘 부르지 않았다. 혼자 청계던전을 도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도 부러워요." 하늘이 말했다. "뭐가." "뭐라도 있잖아요, 선배님은."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캔을 든 손이 조금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오후 2시 17분. 다시 사무실로 내려왔다. 전화벨이 또 울렸다.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강 대리, 급한 건 하나만." 팀장이었다. "오늘 안에 거래처 전부 재계약서 다시 보내." "네." "14퍼센트면 이번 분기 실적 날아가." 수화기 너머 팀장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몇 년째 들어왔다. 톤이 올라가는 지점, 말이 빨라지는 순간까지 예측할 수 있었다. 그게 딱히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실적, 손실률, 재계약. 또 숫자였다. 오후 내내 나는 재계약서를 손봤다. 숫자를 지우고 다시 썼다. 다시 지우고 또 썼다. 같은 문서를 열두 번 넘게 고쳤다. 눈이 침침해질 때쯤에야 겨우 끝이 났다. 오후 6시 40분.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나는 창에 기댔다.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29살. 7년째 같은 자리. 현장감이라곤 없는 삶.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주식 그래프를 보고 있었다. 빨간 선, 파란 선. 나는 눈을 돌렸다. 숫자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느껴야 하는데, 느껴지지 않았다. 분노도, 열정도, 하다못해 지겨움조차도. 텅 빈 감각만 남아 있었다. 역을 몇 개 지나는 동안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도 머릿속에는 오늘 통화한 거래처 열둘의 목소리가 반복 재생됐다. 같은 문장, 같은 어조. 마치 녹음테이프를 계속 되감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한 건 오후 8시였다. 원룸, 12평. 나는 씻고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을 봤다. 메시지함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오늘 하루의 소음이 한꺼번에 뚝 끊긴 느낌이었다. 그 정적이 오히려 낯설었다. [던전 시스템 알림] 낯선 문구였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이런 알림은 한 번도 없었다. 7년간 던전을 드나들면서 받아본 알림이라고는 클리어 보상 안내나 몬스터 출현 경고 정도였다. 이런 형식의 문구는 처음이었다. 글자체마저 평소와 달랐다. [각성 특이사항 감지] [새로운 등급의 스킬이 부여됩니다] 손이 떨렸다. 새로운 등급.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F급 아래로 등급이 더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F급 위로 새로운 게 생긴다는 것도 이상했다. 스킬 등급은 이미 오래전에 고정된 체계였다. 그런데 지금, 화면 속 문구는 그 체계 자체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오늘 하루 종일 무감각했던 몸이 갑자기 반응하고 있었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화면을 다시 봤다. 문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화면이 하얗게 번쩍였다.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빛은 눈꺼풀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그 안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였다. 나는 그 빛 속에서, 처음으로 오늘 하루 잊고 있던 감각 하나를 되찾았다.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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