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연회장의 음악이 잠시 멎었다.
바이올린 선율이 뚝 끊기고, 그 뒤를 따르던 첼로 소리도 슬그머니 잦아들었다. 악단이 활을 내리는 순간,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뭐지, 이 타이밍은.'
연회는 원래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세 시간짜리 무도회라면 적어도 두 시간 반은 음악이 끊이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왕궁 연회에서 이런 식으로 갑자기 음악이 멎는 건 딱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국왕이 무언가를 발표할 때.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단상으로 쏠렸다. 나 역시 그쪽을 바라봤다. 옆에서 웅성거리던 귀족 영식 하나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고, 손에 든 부채로 얼굴 반쪽을 가리고 있던 영애들도 슬며시 부채를 내렸다.
국왕, 유진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현국을 다스린 지 이십 년이 넘은 왕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온화한 인상으로 유명해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자애로운 군주'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얼굴에서 평소와는 다른 게 느껴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
'왜 저런 얼굴을 하고 계시지.'
나는 부채를 살짝 접었다 폈다. 손끝이 미묘하게 서늘했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전할 소식이 있다."
왕의 목소리가 연회장 전체에 울렸다. 낮고 무게감 있는 음성이었다. 평소라면 사람들 좋아 보이는 인사말이나 덕담부터 늘어놓을 자리인데, 오늘은 시작부터 본론으로 직행하고 있었다.
'뭔가 큰일이 있나 보네.'
사람들이 술렁였다. 나도 모르게 부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그 소문 얘긴가.'
최근 왕궁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백 년 전에도 있었다는, 하늘에서 낯선 존재가 내려온다는 이야기. 처음에는 나이 든 궁녀들 사이에서만 조용히 오가던 말이었다. 늙은 유모가 손자에게 옛날이야기 들려주듯 소곤거리던 그런 이야기.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시녀들 사이에서도 심심찮게 들렸다. 심지어 어제는 내 방을 청소하던 시녀가 창밖을 보며 "이번엔 정말 오시려나요" 하고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
'이번엔 정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시녀는 내 시선을 느끼자마자 화들짝 놀라 사과하고 방을 나갔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넘겼는데, 지금 이 순간 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소은이 내 옆에서 살짝 숨을 들이쉬는 게 느껴졌다.
소은은 내 전속 시녀로, 열두 살 때부터 나를 모셔온 아이였다. 이제는 아이라기보다 어엿한 숙녀에 가까웠지만, 나는 여전히 그 애를 볼 때마다 통통했던 열두 살 시절이 겹쳐 보였다.
"영애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다들 무서워하고 있어요."
소은이 낮게 속삭였다.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뭔가를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는 느낌이에요."
'무서워한다고? 뭘?'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소은의 말이 맞았다. 사람들의 눈빛에는 기묘한 흥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폭죽이 터지기 직전, 심지에 불이 붙는 걸 지켜보는 구경꾼들 같은 표정이었다.
'다들 뭘 기대하는 건데.'
나는 답을 몰랐고, 답을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왕이 손짓을 하자 재하가 단상 위로 올라섰다.
재하. 나와 십 년 넘게 약혼 관계였던 남자. 온성 후작가와 재하가 속한 가문 사이의 정략혼으로 맺어진 사이였지만, 나는 그를 미워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가끔은 좋아한다고 착각할 만큼 다정한 순간들도 있었다. 어릴 때 함께 정원을 뛰어다니던 기억, 열병에 걸렸을 때 밤새 곁을 지켜주던 기억. 그런 조각들이 쌓여서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오늘, 그가 단상 위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평소와 달랐다.
그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까 그 벽 같던 눈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안함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뭐야, 저 표정.'
마른침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미안한 표정이라니. 미안할 일을 하려는 거구나, 저 남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기 직전에 짓는 얼굴이 있다. 재하는 지금 딱 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공표할 것이 있습니다."
재하가 입을 열었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 와인잔을 내려놓는 소리조차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부채를 완전히 접었다. 손끝이 하얘질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다.
'설마.'
설마, 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십 년을 함께한 사이인데, 설마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저, 재하는 온성 후작 영애 서연과의 혼약을 오늘부로 파기하고자 합니다."
순간 연회장 전체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뭐라고?'
나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다시 곱씹었다. 파기. 혼약을. 나와. 오늘부로.
'이게 무슨 소리야, 지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가 다시 새까매졌다. 방금 들은 말이 맞는지 확인하듯, 나는 재하의 입술 모양을 다시 뜯어봤다. 파, 기. 두 글자가 그대로 다시 그려졌다.
'아니, 잠깐, 지금 여기서?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표면적으로는 최대한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다. 부채를 쥔 손끝이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다행히 부채에 가려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입꼬리도 살짝 올려두었다. 이럴 때일수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십 년 넘게 약혼자였는데,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미리 언질이라도 좀 주지.'
최소한의 예의도 없나. 사람을 이렇게 공개 처형하듯 망신 줄 필요가 있었나. 편지 한 장이라도, 아니 시녀 한 명 보내서 미리 언질이라도 줬으면 이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았을 텐데.
'저 인간이 진짜.'
연회장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온성 영애가 파혼을?"
"이유가 뭐래?"
"설마 그 소문 때문인가?"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누군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옆 사람에게 귓속말을 했고, 누군가는 대놓고 나를 가리키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값을 매기고, 평가하고, 어쩌면 즐기고 있었다.
'그래, 실컷 봐라. 구경거리 났으니.'
나는 이를 악물었다. 겉으로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였다. 이 순간 무너지면 저 사람들에게 완전한 승리감을 안겨주는 꼴이다.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소은이 내 손을 살짝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나보다 더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영애님…."
소은이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애도 모르는 눈치였다.
왕비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나를 향해, 아까와는 다른 시선을 보냈다.
동정인지 안도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묘한 눈빛이었다. 왕비는 평소 나를 며느리 삼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건, 뭔가 내가 모르는 사정이 더 있다는 뜻이었다.
'왕비님까지 저런 얼굴을 하시면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재하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나는 그가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직감했다.
이 파혼의 이유. 그리고 그 이유가 나를 얼마나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넣을지.
연회장 안의 모든 시선이, 모든 숨소리가 재하의 입술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채를 쥔 손끝에서 땀이 배어났다.
'제발 별거 아니길.'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정도로 판을 깔아놓고,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나올 말이 '별거 아닌 이유'일 리가 없다는 걸.
재하의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