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생능력 숨긴 파혼 영애

3화

"파혼의 이유는…." 재하가 말을 이었다. 그 짧은 침묵 사이에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훑어봤다. 저 잘생긴 얼굴에 담긴 표정이 뭔지 궁금해서였다. 미안함? 죄책감? 아니면 그냥 귀찮음? '표정만 봐선 하나도 모르겠네.' 연회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 수백 개의 시선이 일제히 재하에게 꽂혔다. 모두가 숨죽인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 역시 숨을 죽였다. 다만 내 경우엔 기대감이 아니라 불안감 때문이었지만. "왕가의 오랜 소명 때문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궁정 곳곳에서 낮은 탄식이 흘렀다. 부채로 입가를 가리는 귀부인들,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대신들, 술렁이는 파도처럼 번지는 웅성거림. '소명?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왕가의 소명이라는 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 있길래 파혼의 사유로 들먹여지는 건지. 하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 적어도 유지하려 애썼다. 입꼬리가 떨리려는 걸 억지로 붙잡고, 손끝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부채를 꽉 쥐었다. 국왕이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말을 이었다. 육중한 몸이 움직일 때마다 옥좌 옆의 시종들이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백 년마다 이 나라에는 낯선 손님이 강림한다. 이는 왕가에 대대로 전해져 온 사명이자 숙명이다. 그 손님을 맞이하고 예우하는 것이 왕가의 의무이며, 이번 대에 그 시기가 도래했다." 연회장 안이 술렁였다. 낯선 손님, 강림. 이 나라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어렴풋이 알고 있는 전설이었지만, 실제로 그것이 코앞에 닥친 현실이라고 선포하는 건 처음이었다. 몇몇 노귀족은 성호를 긋듯 손을 모았고, 젊은 대신들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강림? 그거 완전 판타지 아니야.'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이런 이야기가 낯설지 않았다. 이세계, 소환, 강림. 익숙한 클리셰였다. 라이트노벨이나 웹소설에서 수도 없이 봤던 설정. 다만 그게 내 인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 줄은 몰랐을 뿐이다. '설마 진짜로 이런 게 있을 줄이야.' 전생의 나는 그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항상 주인공을 부러워했다. 특별한 존재, 선택받은 자. 근데 지금 나는 뭐지. 선택받은 자의 약혼녀였다가, 그 선택 때문에 버려지는 신세라니. 이런 전개는 어느 소설에서도 못 봤다. 재하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잠깐 미안함이 스친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착각인가. "그 손님을 곁에서 보필해야 하는 것이 저의 소임이 되었습니다. 하여 온성 영애와의 혼약은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파기함을 밝힙니다." 짝, 짝, 짝.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궁정 대신 중 하나였다. 국가적 대의를 위한 결단이라며 칭송하는 목소리도 곧이어 뒤따랐다. "과연 왕세자 저하십니다. 개인의 안위보다 나라의 안녕을 먼저 생각하시다니." "저런 결단을 내리시기가 어디 쉬운 일입니까." '와, 진짜 재밌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내 인생이 걸린 일인데 다들 박수를 치고 있었다. 마치 잘 짜인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들처럼. 어쩌면 진짜 그런 걸지도 모르지. 나만 모르고 무대에 올라간 배우였던 거고. '대본이라도 미리 주지 그랬냐.' 소은이 내 팔을 살며시 붙잡았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나보다 더 긴장한 것 같았다. "영애님, 지금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소은은 어릴 때부터 나를 따르던 시녀였다. 내가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 중 하나. "괜찮아." 나는 짧게 답했다. '괜찮을 리가.' 속마음은 정반대였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면 그야말로 구경거리 하나가 더 추가될 뿐이었다. 안 그래도 이미 충분히 볼거리를 제공했는데. 그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감쌌다. 익숙한 손길이었다. 크고, 단단하고, 조금은 차가운 손. "이제 그만 나가자." 아버지, 온성 후작 도현이었다. 온성 후작가는 대현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였고, 아버지 도현은 그중에서도 냉철하고 신중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궁정 내에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전장에서 세운 공으로 후작위를 받았다는 소문도 있고, 왕가와도 오랜 인연이 있다는 얘기도 있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원래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버지…." 나는 조금 안심이 되는 걸 느꼈다. 동시에 창피함도 밀려왔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딸이 파혼당하는 걸 보게 하다니.' 명색이 후작가의 영애인데, 이런 식으로 만인 앞에서 버려지는 꼴을 아버지에게 보이다니. 차라리 조용히 서신 한 장으로 통보받았으면 나았을까. 아니, 그건 그것대로 더 서러웠을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놀란 기색도, 분노한 기색도 없었다. '뭐지, 이 반응은.'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나는 슬쩍 아버지의 옆얼굴을 훔쳐봤다. 미간에 잡힌 주름 하나 없이 평소와 똑같았다.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다. 딸이 이렇게 개망신을 당했는데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나. 아버지는 나를 감싸 안다시피 하며 연회장 밖으로 이끌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등 뒤로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따라붙었다. "저것 봐, 저 표정." "이제 완전히 끈 떨어진 신세네." "버려진 영애라니, 안됐다." "그러게, 그렇게 도도하게 굴더니." '그래, 실컷 떠들어라.' 나는 입술을 짧게 깨물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여기서 울면 그야말로 최고의 안줏거리가 될 테니까. 연회장 복도로 나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안에서는 그렇게 버티고 있었는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긴장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팔로 나를 지탱해줬다. "괜찮으냐." 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겠어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지금 내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화가 나는 것도 같고, 창피한 것도 같고, 허탈한 것도 같고. 이 셋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뭐가 뭔지 구분이 안 됐다. 복도의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비친 우리 그림자도 함께 흔들렸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복도 저편에서 시녀 한 명이 다급히 다가왔다. 치맛자락을 붙잡고 뛰다시피 걸어오는 모습이었다. "온성 영애님, 왕비마마께서 독대를 청하십니다." '뭐? 하필 지금?' 나는 아버지를 돌아봤다. 아버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아까 그 담담하던 표정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저건 또 왜 저래.'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시더니, 왕비 독대라는 말에는 확실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야겠구나." 아버지가 짧게 말했다. "제가 가도 되는 거예요, 지금?" 방금 파혼당한 사람이 왕비를 독대하러 간다니. 이게 정상적인 절차인가 싶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좀 쉬라고 하지 않나. "가라. 그리고 무슨 말을 듣든, 흔들리지 마라." 그 말이 왠지 불길하게 들렸다. '흔들리지 말라는 건, 흔들릴 만한 얘기가 나온다는 소리잖아.'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시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동안, 등 뒤에서 아버지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걱정과 초조함이 뒤섞인, 평소의 아버지답지 않은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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