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생능력 숨긴 파혼 영애

4화

왕비의 처소는 연회장의 소음이 전혀 닿지 않는 조용한 곳이었다.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에도 등 뒤에서는 여전히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질수록 이상하게 심장은 더 크게 뛰었다. '설마 여기서 사약이라도 내리시려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최악의 상상이 머릿속을 채웠다. 파혼당한 여자를 굳이 따로 불러들이는 이유가 좋은 소식일 리 없었으니까. 시녀가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문턱을 넘자마자 예를 갖춰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마마." "앉아라." 왕비가 짧게 말했다. 명령형이었지만 어조는 뜻밖에 부드러웠다. '뭐야, 이 태도는.' 파혼 발표가 있었던 그 자리에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조카를 대하듯 시선이 부드러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으며 속으로 몇 번이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방석은 푹신했지만 엉덩이가 안 붙었다. 왕비는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일에 대해 원망이 클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예." 나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왕비 앞에서 감출 수 있는 표정도 아니었다. 눈이 붓지 않은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백 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왕비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세계에서 여인이 강림했고, 그 존재는 이 세계와 왕가에 막대한 힘을 가져다주었다. 대신 그를 맞이하고 시중드는 이는 반드시 왕가의 직계여야 했지." '그게 재하란 거네.' 나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재하의 이름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 오늘 낮에 봤던 그 어정쩡한 표정, 갑작스러운 파혼 선언, 그리고 왕이 짓던 묘하게 만족스러운 미소까지. 전부 이 얘기를 위한 밑밥이었던 거다. "이번에도 그 손님이 강림한다는 징조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손님을 보필할 사람으로 재하가 정해졌다." "그럼 저는요?" 나는 물었다. "저는 그냥, 걸림돌이었던 거네요." 목소리에 냉소가 살짝 섞였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담담한 어조였다. 원래 이럴 때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은 안 나오고 자꾸 헛웃음만 나오려 했다. 왕비가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지." "어떻게요." "너는 이제 왕가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왕비의 말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파혼당한 것이고, 사교계에서 웃음거리가 될 처지였다. 내일이면 온 왕도의 귀족들이 내 이름을 안주 삼아 술잔을 부딪칠 것이다. '그 재생 능력자 아가씨, 결국 버려졌다며?' 하고. 그런데 굴레에서 벗어났다니. "솔직히 말하마." 왕비가 목소리를 낮췄다. "나는 오랫동안 네 재생 능력에 신세를 졌다. 사냥터의 화상, 그 외에도 몇 번이나. 그때마다 너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나를 도왔지." '그야, 왕비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으니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대가를 바라지 않은 게 아니라 바랄 처지가 아니었을 뿐이다. 사냥터에서 왕비가 화살에 스치듯 맞았을 때, 나는 새벽까지 손끝에서 피가 나도록 치유를 걸었었다. 그날 밤 손가락 마디마디가 부어올라 젓가락질도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솔직히 왕가는 너의 능력을 계속 이용할 생각이었다. 재하와의 혼인 후에도, 왕비가 될 너에게 계속 나와 왕실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역할을 맡길 계획이었지." 마른침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러니까, 나는 결혼해서 평생 왕가의 힐러로 살아야 했다는 거네.' 등골이 서늘해졌다. 결혼식 다음 날부터 시댁 식구들 상처 치료하러 다니는 그림이 눈앞에 그려졌다. 명절마다 며느리가 손에 붕대 감고 시부모 다친 데 치료해주는 그런 집안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손목이 시큰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번 강림으로 그 계획이 어그러졌다. 재하는 새로운 손님을 보필해야 하고, 너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빠지게 됐지." 왕비가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는 이걸 네게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다만 확실한 건, 너는 이제 자유롭다는 것이다." '자유라….' 그 말이 이상하게 낯설고도 반가웠다. 자유라는 단어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들어본 게 언제였던가. 태어날 때부터 재생 능력이라는 게 있었고, 그 순간부터 나는 늘 누군가의 것이었다. 왕가의 것, 재하의 것, 나중엔 시댁의 것이 될 예정이었던 물건.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왜 왕비가 굳이 이런 진실을 나에게 알려주는 걸까. 그냥 조용히 넘어가도 될 일을. 파혼 통보 한 번이면 끝날 일을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해줄 이유가 없었다. "왜 이런 얘기를 저한테 해주시는 거예요?" 내가 묻자 왕비는 옅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네가 나에게 해준 것에 대한 최소한의 답례다. 그리고…." 왕비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너는 알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라니.'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방금 전까지 자유롭다는 말에 살짝 들떴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 세계는 늘 이런 식이었다. 좋은 소식 하나에는 반드시 나쁜 소식이 딸려왔다. "강림할 존재는, 단순히 온화한 손님이 아니다." 왕비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촛불 그림자가 왕비의 얼굴 위로 일렁였고, 그 표정은 조금 전까지의 부드러움과는 다른 무게를 담고 있었다. "백 년 전 기록에 따르면, 그 존재는 여신의 사생아라 불렸다. 그리고 이 나라를 이롭게 할지, 파멸시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여신의 사생아?' 말만 들어도 뭔가 심상치 않았다. 여신씩이나 되는 존재의 사생아라니. 집안 내력부터가 이미 평범하지 않았다. 그런 존재를 재하가 상대해야 한다는 거고, 나는 그 옆에서 완전히 발을 뺀 셈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려는 찰나였다. 그 순간 처소 문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등을 곧게 폈다. "마마, 급보입니다!" 시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 있는 게 문 너머로도 느껴졌다. 왕비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대답했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시녀가 황급히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 존재의… 강림 징조가 예상보다 훨씬 앞당겨졌다고 합니다." 왕비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그 표정을 본 순간, 방금까지 느꼈던 안도감 같은 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뭔가, 정말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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