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생능력 숨긴 파혼 영애

5화

왕비의 처소를 나서자마자 아버지가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둥에 몸을 살짝 기댄 채로, 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이. '또 저 자세네.' 아버지는 늘 저랬다. 아무리 큰일이 벌어져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오늘 같은 날조차도. "뭘 들었느냐." 아버지가 낮게 물었다. 목소리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지만, 나는 안다. 저 무심한 톤 뒤에 숨겨진 긴장을. "거의 다요." 나는 짧게 답하며 방금 들은 이야기를 요약해서 전했다. 백 년 주기의 강림, 왕가의 소명, 그리고 내가 계속 왕가의 힐러로 이용당할 뻔했다는 것까지. 말을 하는 동안에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왕비의 처소에서 들었던 그 담담한 목소리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마치 내 인생 전체를 서류 한 장으로 처리하듯 말하던, 그 태연함이. 아버지의 표정에는 큰 동요가 없었다. '역시, 이미 알고 계셨구나.' 나는 확신했다. "아버지, 혹시 이 모든 걸 미리 알고 계셨어요?"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담담히 답했다. "몇 년 전부터 궁정 서고에서 이상한 기록들이 오가는 걸 알아챘다. 백 년 주기의 기록, 그리고 왕가가 은밀히 준비해온 흔적들." "그런 기록을 보고도 저한테 아무 말씀 안 하셨다는 거예요?" "확신이 없었으니까." 아버지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리고 만약 네가 미리 알았다면, 오늘 그 자리에서 그렇게 태연하게 서 있지 못했을 거다." 그 말에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하긴, 미리 알았으면 아마 그 자리에서 뒤집어졌겠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왕비의 처소 한복판에서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는 내 모습이라니. "그런데 왜 저한테 미리 말씀 안 해주셨어요." 나는 그래도 원망 섞인 투로 다시 물었다. 이미 답을 들었으면서도, 뭔가 더 캐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아버지의 목소리에 옅은 웃음기가 섞였다. "두 번 말하게 하는구나." 아버지 나름의 배려였다는 걸 알기에, 나는 더 따지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럼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자유로워진 거지." 아버지가 짧게 말했다. "왕가의 혼약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네 미래는 네가 원하는 대로 그릴 수 있다." '말은 쉽지,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가.' 속으로는 냉소가 섞였지만, 동시에 이상한 안도감도 함께 밀려왔다. 마치 몇 년간 목을 조이던 코르셋을 벗어던진 기분이랄까.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까지 재하와의 혼약이라는 틀 안에서만 미래를 그려왔다. 왕실 며느리, 미래의 왕비, 그리고 평생 왕가를 위한 힐러. 그게 내 운명이라 여기고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참 우스운 일이었다. 열아홉 살이 되도록 단 한 번도 '내가 뭘 하고 싶은가'를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재하의 아내가 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목표였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 틀이 깨졌다. '그럼 나는 뭘 원하는데?'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목표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저 막막함만 남았다. 마치 오랫동안 갇혀 있던 방에서 갑자기 문이 열렸는데, 정작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 그런 기분. "아버지, 그런데 사교계에서는 저를 어떻게 볼까요." 나는 현실적인 걱정을 꺼냈다. 파혼당한 영애라는 꼬리표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 나라의 사교계가 얼마나 잔인한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버려진 영애라고 떠들어대겠지." 아버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실제로도 벌써 그렇게 부르는 이들이 있어요." 연회장에서 들었던 수군거림이 떠올랐다. 부채로 입을 가린 채 흘끔거리던 시선들, 그리고 그 사이로 새어 나오던 낮은 웃음소리. '그렇게 재밌나. 남의 인생 망가지는 게.'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겉으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이런 얼굴 관리만큼은 이제 도가 텄다. "그러라고 둬라." 아버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온성 후작가는 결코 만만한 가문이 아니다. 이번 일로 우리 가문의 입지가 흔들릴 거라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건 그들의 착각일 뿐이다." 그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가 저런 톤으로 말할 때는, 이미 뒤에서 손을 다 써놓았다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이건 뭐예요?" "왕실에서 이미 파혼에 대한 보상으로 준비한 것이다. 영지 하나와 상당한 위로금. 그리고 무엇보다, 너의 향후 혼사에 대해서는 왕실이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다." '오, 이건 좀 쓸만한데.' 순간적으로 실용적인 계산이 머릿속을 스쳤다. 슬픈 상황 속에서도 이런 계산이 먼저 튀어나오는 나 자신이 좀 우습기도 했다. 영지 하나. 위로금. 그리고 혼사 불간섭 서약.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아니, 솔직히 말하면 꽤 남는 장사 아닌가?' 파혼당했다는 상처보다, 손에 쥔 서류의 무게가 더 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절대 티 내지 않았다. "이걸 벌써 받아내셨어요?" 나는 서류를 받아 들며 물었다. 종이의 감촉이 서늘했다. "연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협상해둔 것이다." 아버지가 짧게 답했다. "연회 시작 전부터요? 그럼 아버지는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이미 알고 계셨던 거잖아요." "짐작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짐작 치고는 준비가 너무 완벽한 거 아니에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와, 진짜 준비성 무슨.' 나는 새삼 아버지를 다시 봤다. 겉으로는 무심해 보였지만, 이 모든 상황을 미리 예상하고 딸을 위해 최소한의 안전망을 마련해둔 사람이었다. 문득 코끝이 시큰해졌다. 아버지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지키려 했다는 걸 깨닫자, 원망했던 마음이 조금 무안해졌다. "이제 네가 원하는 삶을 그려봐라."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한, 돕겠다." 그 말에 마음 한구석이 조금 뭉클해졌다. 아버지가 이렇게 다정한 말을 한 게 대체 얼마 만인지. 하지만 그 감상도 오래가지 못했다. 복도 저편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 자락이 대리석 바닥을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에스틴 백작 부인. 사교계에서 소문을 퍼뜨리기로 유명한 인물이었고, 지금까지 늘 나에게 아부하듯 굴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온성 후작가와 친분을 쌓으려 늘 애를 썼다. 연회 때마다 내 옆자리를 차지하려 안달했고, 내가 무슨 옷을 입든 칭찬 일색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표정부터가 달랐다. 입가에 걸린 웃음이 노골적으로 비웃음에 가까웠다. "어머, 온성 영애." 그녀가 일부러 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주변 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듯이. 복도를 지나던 몇몇 시종들도 슬쩍 걸음을 늦추며 이쪽을 흘끔거렸다. "이제는 그냥 서연 아가씨라고 불러야 하나요? 호호." 부채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서늘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이미 나를 씹어 삼키고 있다는 게 뻔히 보였다. '이 여자가, 진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게 최고급 향수를 선물이랍시고 들이밀던 사람이, 이제는 저런 얼굴로 서 있다. 어쩜 저렇게 표정을 빨리 바꾸는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부채를 접으며 그녀를 마주 봤다.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부인, 오랜만이네요. 아, 참고로 저는 여전히 온성 영애입니다. 그렇게 부르셔도 무방해요." 내 대답에 그녀의 눈매가 순간 흔들렸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앞으로 이런 자들을 몇 번이나 더 상대해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에스틴 백작 부인 같은 이가 하나뿐일 리 없었다. 사교계 전체가 곧 이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각오가 마음 한켠에서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 에스틴 백작 부인의 웃음이 슬며시 굳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결코 이 정도 선에서 끝나지 않을 거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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