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간호사복 입은 재벌 소녀

1화

새벽 여섯 시, 알람이 울렸다. 김도윤은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좁은 원룸의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냉장고 모터 소리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도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서울 변두리, 반지하보다 조금 나은 원룸. 보증금은 부모님 몰래 모은 알바비로 겨우 맞췄다. 여섯 평이 채 안 되는 방 안에는 매트리스 하나, 옷걸이 하나, 작은 접이식 테이블 하나가 전부였다. 그게 도윤이 가진 모든 것이었다. 도윤은 씻지도 않은 얼굴로 식탁 앞에 앉아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 처리된 삼각김밥을 뜯었다. 포장지가 손끝에서 바삭거리며 벗겨졌다. ‘엄마가 알면 또 난리 나겠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마자 짐을 싸서 나온 건 순전히 도윤의 결정이었다. 방문 앞에 항상 서 있던 어머니, 학원 스케줄을 초 단위로 관리하던 아버지.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면 집안 공기가 얼음장처럼 굳었다. 도윤에게 필요한 건 자유가 아니라 그저 ‘혼자 해내는 경험’이었다. 누군가의 감시 없이 스스로 실패하고 스스로 일어서는 그 감각. 물론 쉽지 않았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편의점 알바로, 주말이면 물류센터 단기 아르바이트로 몸을 갈아 넣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겨우 이 방 하나를 지켜내고 있었다. 삼각김밥을 씹으며 도윤은 시계를 힐끗 보았다. 일곱 시 이십 분. 한서고등학교까지는 버스로 삼십 분. 오늘도 지각은 없었다. 도윤은 마지막 한 입을 삼키고 물을 벌컥 들이켰다. 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나섰다. 낡은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가는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골목 끝에서 큰길로 접어드는 순간, 도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여학생이 보였다. 하얀 교복 셔츠에 단정하게 묶은 머리, 손에 든 참고서. 얼굴을 아는 사람이었다. 한서고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름, 서지아. ‘천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 서지아. 성적도 좋고, 성격도 다정하고,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아서 붙은 별명이었다. 도윤과는 같은 학년이지만 반이 달라서 대화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복도에서 몇 번 스쳐 지나간 게 전부였다. 그 서지아가, 신호가 바뀐 것도 모르고 스마트폰을 보며 걸어 나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화면에 집중한 표정으로. 발걸음에는 아무런 경계심도 없었다. 부아앙— 골목 안쪽에서 트럭 한 대가 좌회전 신호를 무시하고 튀어나왔다. 경적이 찢어질 듯 울렸다. 도윤의 눈에 모든 게 슬로모션처럼 늘어졌다. 트럭의 앞부분, 지아의 발끝, 그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아지고 있었다. 생각은 나중이었다. 도윤의 몸이 먼저 튀어 나갔다. “위험해요!” 두 손으로 지아의 어깨를 밀어붙였다. 손바닥에 닿은 지아의 몸이 놀랄 만큼 가벼웠다. 지아의 몸이 인도 쪽으로 튕겨 나가는 순간, 도윤의 오른팔이 트럭 사이드미러에 걸렸다. 쾅. 짧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도윤의 몸이 붕 떠올랐다가 아스팔트 위로 나동그라졌다. 어깨와 등이 먼저 바닥에 부딪혔고, 그 뒤로 뒤통수가 살짝 튕겼다. “…….” 숨이 턱 막혔다. 오른손이 이상하게 꺾여 있었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통증이 뒤늦게 몰려왔다. 처음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다가, 곧 온몸을 관통하는 듯한 저릿함이 밀려왔다. “괜찮아요? 저기요, 괜찮아요?!” 귀에 익지 않은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지아가 무릎을 꿇고 도윤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 떨리는 손끝. 참고서는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펼쳐진 채였다. “…팔이…….” 도윤이 힘겹게 중얼거렸다. 오른쪽 손목이 낚싯줄에 걸린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늘어져 있었다.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에도 도윤은 그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지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벌어졌다. “어떡해, 어떡해…….” 트럭 기사가 허둥지둥 뛰어나와 전화를 걸고 있었다.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나둘 걸음을 멈추고,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는 “학생, 정신 차려!” 하고 소리쳤고, 또 누군가는 “구급차 불렀어요?” 하고 되물었다. “누가 119 좀…….” 지아가 소리쳤다. 목소리에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늘 차분하다고 알려진 그 서지아의 목소리가 이렇게 갈라질 수 있다는 게, 이 상황에서도 이상하게 도윤의 머릿속에 남았다. 도윤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저 트럭이 그대로 지아를 쳤다면, 지금 이 자리에 쓰러진 건 자신이 아니라 저 여자였을 거라는 것. 몸통 전체로 부딪혔을 테고, 어쩌면— 그 뒷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의식이 서서히 흐려졌다. 사이렌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도윤의 시야 끝에, 새하얗게 굳은 지아의 얼굴이 마지막으로 남았다. 그녀의 손이 도윤의 손을 붙잡고 있다는 걸, 의식이 완전히 끊기기 직전에야 겨우 느낄 수 있었다. 응급실은 소독약 냄새로 가득했다.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찔러왔다. 도윤이 눈을 떴을 때, 오른손은 이미 부목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팔 전체가 무겁고 뻣뻣하게 느껴졌다. “요골 원위부 골절입니다. 수술은 필요 없지만 최소 3주는 깁스해야 해요.” 의사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흘렀다. 차트를 넘기는 손길에는 별다른 감정이 묻어 있지 않았다. 그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진단의 한 조각일 뿐이었다. 도윤은 천장을 바라보며 마른 숨을 내뱉었다. ‘3주라니.’ 알바는 어떻게 하지. 편의점 사장은 손 하나 다친 걸로 배려해줄 사람이 아니었다.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도 당연히 못 나갈 테고. 손목 하나로 무너지는 계획들이 머릿속에 줄줄이 늘어섰다. 이번 달 월세는 겨우 맞췄지만, 다음 달은— 자립하겠다고 큰소리쳤는데, 벌써 발이 걸려 넘어진 기분이었다. 겨우 반년, 그 반년을 버텨왔는데. 병실 문이 열렸다. 간호사가 링거 폴대를 밀며 들어왔다. 바퀴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보호자분 연락은 하셨어요?” 도윤의 손끝이 움찔했다. “…아직요.” 부모님께 연락하면 그날로 원룸 생활은 끝이었다.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짐을 챙겨서 다시 집으로 끌려갈 게 뻔했다. 도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창밖으로 해가 완전히 떠 있었다. 벌써 등교 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담임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그것도 막막했다. 간호사는 별말 없이 링거액을 확인하고는 다시 병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조용한 병실 안에 오래 남았다. 도윤은 눈을 감았다.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지는 이상한 상태였다. 아까 그 순간이 계속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트럭의 경적, 지아의 뒷모습, 손바닥에 닿았던 어깨의 감촉. 그리고 그 새하얗게 굳었던 얼굴. ‘괜찮으려나.’ 몸은 다쳤어도 그 여자애는 무사했으니 된 거라고, 도윤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차피 모르는 사람이었다. 앞으로도 마주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병실 밖 복도에서 낮은 실랑이 소리가 들려왔다. “보호자 아니시면 면회 안 됩니다.” “제가 사고 당사자예요. 잠깐만 얼굴만 보고 갈게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도윤의 심장이 이상하게 빨라졌다. 방금까지 머릿속에서 재생되던 그 얼굴이, 목소리로 되살아나 귓가에 닿는 순간이었다. 간호사와 지아의 목소리가 몇 번 더 오갔다. 발소리가 점점 병실 쪽으로 가까워졌다. 도윤은 부목으로 고정된 오른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링거 폴대 옆에서도 들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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