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간호사복 입은 재벌 소녀

2화

복도의 목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간호사가 단호하게 문을 지키고 있었고, 서지아는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면회는 보호자만 가능합니다.” 간호사의 말투는 사무적이었지만 단단했다. 지아는 잠시 문고리 쪽을 바라보다가, 결국 등을 돌렸다. 구두 굽 소리가 복도 끝으로 멀어졌다. 도윤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애매한 안도와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괜히 마음 쓰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도윤은 왼손으로 이불을 끌어당겼다. 오른손 깁스가 묵직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손가락 끝이 저릿했다. 붕대 너머로 느껴지는 통증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가라앉았다. 3주. 의사가 말한 기간이었다. 3주 동안 오른손을 쓸 수 없다는 뜻이었고, 그건 곧 편의점 알바도, 물류센터 일도 전부 멈춰야 한다는 뜻이었다. ‘월세는 어떻게 내지.’ 도윤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손끝으로 계산을 해보았다. 이번 달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달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엄마한테 말할 순 없어.’ 그건 곧 자립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부모님 곁을 떠나 자취를 선택하고,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감당하겠다고 큰소리쳤던 지난겨울의 자신이 떠올랐다. 엄마는 걱정했고, 도윤은 괜찮다고, 잘할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했었다. 도윤은 손끝으로 이불깃을 꾹 쥐었다.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여기서 무너지면 그동안 버틴 시간이 전부 헛일이 되는 것 같았다. “후우—” 병실 창문 밖으로 저녁 하늘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도윤은 눈을 감았다. 통장 잔고를 떠올리자 속이 더 답답해졌다. 그날 밤, 도윤은 결국 부모님이 아니라 담임 선생님께만 사고 소식을 알렸다. 문자를 쓰는 손끝이 자꾸 멈췄다. 몇 번이나 지웠다가 다시 쓴 문장은 짧고 무덤덤했다. [선생님, 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어요. 큰일은 아니고 손목만 다쳤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도윤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자취 사실을 굳이 알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학교에는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굳이 세세한 사정까지 전할 이유는 없었다. 병원비는 일단 자기 통장에서 나가는 대로 감당하기로 했다. 응급실 비용, 검사비, 입원료. 숫자를 떠올릴 때마다 위장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같은 시각, 도시 반대편, 서지아의 집. 대저택의 응접실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높은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 불빛이 대리석 바닥 위로 차갑게 흩어졌다. 서지아는 소파에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아버지, 서 회장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 표정에는 걱정이 아니라 계산만이 담겨 있었다. “오늘 아침 뉴스에 네 얼굴이 실렸다.” 서 회장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무거웠다. 태블릿 화면에는 지역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고 현장 사진이 떠 있었다. 화질은 흐릿했지만, 교복을 입은 여학생과 쓰러진 남학생의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학생을 다치게 한 게 너라는 소문이 벌써 돌고 있어.” “…제가 다치게 한 게 아니라, 그 애가 저를 구하다가 다친 거예요.” 지아가 낮게 대답했다. 서 회장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게 더 문제야.” 서 회장은 태블릿을 소파 테이블에 툭 내려놓았다. 화면이 잠깐 흔들리다가 다시 사고 현장 사진으로 고정되었다. “SJ그룹 외동딸이 길에서 낯선 남학생 도움을 받았다는 게 알려지면, 다음 주 투자자 미팅에서 이미지가 어떻게 흔들릴지 생각해봤니?” “…생각 못 했어요.” “생각을 해야지. 넌 이제 그냥 학생이 아니야.” 지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에게 이런 사고는 딸의 안전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지’와 ‘평판’의 문제로 환산되었다. 지아는 문득 어릴 적, 계단에서 넘어져 무릎이 찢어졌을 때도 아버지가 가장 먼저 물었던 말을 떠올렸다. “누가 봤니.” 그때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일 크게 만들지 마라. 병원 쪽에는 조용히 위로금 보내고, 학교 쪽도 정리해.” “…네.” 대답은 순종적이었지만, 지아의 손끝은 무릎 위에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서 회장은 더 말을 잇지 않고 응접실을 나섰다. 구두 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졌다. 지아는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위로금.’ 그 두 글자가 지아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자신을 구하다 다친 사람에게, 아버지는 돈으로 상황을 덮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치 흠집 난 물건을 처리하듯, 깔끔하게, 조용히, 문제가 되지 않도록. 지아는 방으로 올라와 문을 닫고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흩어져 있었다. 지아는 침대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을 열었다. 사고 당시 병원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김도윤이라는 이름도, 응급실 접수 순간 슬쩍 확인해두었다. 화면 속 검색창에 이름을 입력했다가, 지아는 다시 지웠다. ‘검색해서 뭘 알겠다고.’ 지아는 스마트폰을 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대신 창가로 걸어가 유리에 이마를 가볍게 댔다. 차가운 감촉이 뜨거워진 머릿속을 조금 가라앉혀주었다. ‘위로금 봉투 하나로 끝낼 일이 아니야.’ 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가 시키는 방식대로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구하려다 다친 사람을, 돈 몇 푼으로 지워버리는 건 지아가 알던 ‘옳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애는 나를 구했어. 그런데 나는 겨우 봉투나 보내라는 말을 듣고 있고.’ 지아는 자신이 서 있는 방을 둘러보았다. 값비싼 가구, 넓은 창, 그 모든 것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그날 밤, 지아는 옷장 깊은 곳에서 예전에 병원 자원봉사 프로그램에서 받은 간호 실습복을 꺼냈다. 고등학교 동아리 활동으로 몇 번 병원 봉사를 다녀온 적이 있었고, 그때 받은 실습용 간호사복이 아직 남아 있었다. 옷걸이에서 꺼내는 손끝이 조금 떨렸다. 하얀 원단은 세월이 지나 조금 빛이 바랬지만, 옷깃과 소매는 여전히 단정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아는 그것을 침대 위에 펼쳐놓고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보호자가 아니면 면회를 안 시켜준다고 했지.’ 지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결심으로 굳어졌다. ‘그럼 보호자처럼 보이면 되는 거잖아.’ 지아는 다시 옷장을 뒤져 예전에 봉사 다닐 때 썼던 신분증 케이스와 명찰도 찾아냈다. 이름이 적힌 명찰을 손끝으로 매만지다가, 지아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머릿속에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조용히 정리해라. 일 크게 만들지 마라. 하지만 지아의 마음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아는 실습복을 옷걸이에 다시 걸어두고 알람을 맞췄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 도윤이 입원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아침 햇살이 병원 복도 창문을 통해 하얗게 쏟아져 들어왔다. 청소 카트를 미는 소리, 간호사들의 낮은 대화 소리, 어딘가에서 울리는 안내 방송 소리가 뒤섞여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함께 복도를 채우고 있었다. 그 사이로, 하얀 간호사복을 입은 낯익은 얼굴이 조용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명찰을 목에 건 채, 지아는 도윤의 병실 번호가 적힌 팻말을 향해 곧게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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