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간호사복 입은 재벌 소녀

4화

간호사의 시선이 지아의 유니폼을 위아래로 훑었다. 흰색 상의와 짙은 남색 바지, 목에 걸린 신분증 케이스까지—꼼꼼하게 살피는 눈빛이었다. 병실 안에는 소독약 냄새와 함께, 창문 틈으로 들어온 오후 햇살이 침대 옆 링거대를 비추고 있었다. 도윤도 숟가락을 멈춘 채 지아를 쳐다보았다. 손에 들린 죽그릇에서 하얀 김이 가늘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 그게…….” 지아가 말을 더듬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평소라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상황을 정리했을 사람이었다. 도윤은 살짝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대신 숟가락 끝으로 그릇 테두리를 톡톡 두드렸다. “병원 자원봉사팀 소속이에요. 예전에 실습 나왔던 학생이라, 잠깐 도움 드리려고 왔어요.” 간호사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지아의 얼굴과 유니폼을 한 번 더 번갈아 보았다. 몇 초간의 침묵이 병실을 채웠다. 지아는 그 몇 초가 몇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래요, 뭐. 환자 식사 챙기는 거야 나쁠 거 없죠. 대신 처치나 약 관련은 절대 손대지 마세요.” “네, 명심할게요.” 지아의 목소리에는 안도가 살짝 섞여 있었지만, 표정만은 끝까지 침착하게 유지됐다. 간호사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지아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어깨가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윤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자원봉사팀 소속이라니, 완전 거짓말이잖아.” 도윤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침대 헤드보드에 몸을 기댄 채, 눈은 여전히 지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아가 눈을 흘겼다. “도윤 씨한테 좋은 일 하려는 건데, 그렇게 까다롭게 볼 거예요?” “까다로운 게 아니라, 이상해서 그래. 재벌집 딸이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순간, 지아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을 다시 그릇 안에 담그려던 동작이 잠시 멈췄다. “…제가 재벌집 딸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목소리에 경계가 섞여 있었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최대한 감추려고 애썼던 부분이었다. “학교에서 모르는 애가 없어. SJ그룹 서지아. 유명하잖아.” 도윤의 말투는 아무런 악의도 없이 담담했다. 그저 사실을 나열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지아에게는 그 말이 유독 날카롭게 박혔다. 지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학교에서는 최대한 평범하게 지내려고 애쓰던 부분이었는데, 이렇게 정면으로 언급되니 낯설었다. 마치 자신이 오랫동안 감춰왔던 이름표가 갑자기 벗겨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사람은 나를 그냥 유명한 애로 아는구나.’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아는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눈에는 그 미소가 완전히 닿지 않았다. “유명한 것과 상관없이,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고. 유명한 집 딸이 시간 내서 병실에 죽 떠먹여주러 온다는 게.” 도윤의 눈빛이 조금 차가워졌다. 병실 안 조명 아래, 그 눈동자가 유리처럼 단단하게 보였다. “혹시, 이거 나중에 어디 이용하려는 거야? SNS 올릴 사진 찍으려고?” 순간, 병실 안 공기가 얼어붙었다. 창밖에서 들리던 새소리마저 갑자기 아득해진 것 같았다. 지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손에 든 숟가락이 그릇 안으로 툭 떨어졌다. 죽이 살짝 튀어 그릇 테두리에 얼룩을 남겼다. “…그렇게 생각해요?” 지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방금까지 유지하던 침착함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게 보였다. “그게 아니면 뭔데.” 도윤도 물러서지 않았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단호함은 분명했다. 부모님의 과보호 속에서, 도윤이 가장 싫어했던 건 ‘남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남을 통제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봐온 어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걱정한다는 말로 시작해서, 결국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재단하던 사람들. 지아의 돌봄이 진심이라 해도, 도윤은 그 안에 또 다른 형태의 종속이 숨어 있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런 걱정과 애정은, 결국 사람을 옭아매는 사슬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도윤은 몸으로 배워왔다. 지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실 안의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도윤은 그 침묵이 답답했지만,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지아가 천천히 유니폼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구겨진 종이였다. 몇 번이나 접혔다 펴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병원 자원봉사 신청서였다. 지아의 이름과 학번, 서명까지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이거, 어제 밤에 진짜 병원에 제출한 신청서예요.” 지아가 종이를 도윤 쪽으로 조금 내밀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윤 씨한테 보여주려고 가져온 게 아니라, 원래 여기 있어야 하는 사람인 척하려고 만든 거예요.” 도윤은 종이를 받지 않았다. 그저 그 위에 적힌 글씨를 눈으로 훑었다. 서명 옆에 적힌 날짜는 정말로 어제였다. “저 SNS 안 해요. 사진 찍을 생각도 없었고. 그냥…….” 말이 잠깐 끊겼다. 지아는 종이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그냥, 도윤 씨가 저 대신 다친 게 자꾸 생각나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잘 것 같았어요.” 지아의 눈가가 붉어졌다. 눈물이 맺힐 듯 말 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도윤은 그 얼굴을 보며 순간 말이 막혔다. 지금까지 자신이 봐온 지아의 모습—당당하고, 어딘가 완벽해 보이던—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이렇게까지 진심일 줄은.’ 죄책감으로 시작된 행동이라 해도,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매일 새벽같이 병원에 오려면 얼마나 많은 걸 포기해야 했을까. 도윤은 그런 것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 내가 너무 예민하게 말했어.”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병실 벽에 걸린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괜찮아요.” 지아가 눈을 깜빡이며 억지로 웃었다. 눈가에는 여전히 물기가 남아 있었지만, 입꼬리는 애써 올라가 있었다. 그 웃음이 도윤에게는 조금 아프게 다가왔다. 상처를 감추려는 웃음이라는 걸, 도윤도 모르지 않았다. 잠시 병실 안에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창밖에서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앞으로는 미리 말하고 와. 갑자기 이렇게 나타나면 나도 놀라니까.” 도윤이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시선은 여전히 그릇 안의 죽을 향해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조금 전과 다른 온도가 담겨 있었다. 그건 지아의 돌봄을 받아들이겠다는, 도윤 나름의 첫 번째 신호였다. 지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부드럽게 휘어졌다. 방금까지 맺혀 있던 눈물이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옅은 미소가 대신 자리했다. “네. 그렇게 할게요.” 목소리에 안도가 스며 있었다. 그날 오후, 지아는 3주 동안 매일 병실을 찾겠다고 도윤에게 약속했다. 손가락을 접어가며 날짜를 세는 지아의 모습을 보며, 도윤은 그 진지함이 조금 우스우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3주씩이나?” “네. 그때까지는 퇴원 못 하실 거잖아요.” “그건 어떻게 알아?”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던데요.” 도윤은 잠시 말을 잃었다. 어느새 지아는 자신의 진료 일정까지 꿰고 있었다. 그 세심함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도윤은 여전히 마음 한쪽이 불편했다. 지아의 호의가 어디까지 진심인지, 그 안에 자신이 두려워하던 종속의 그림자가 숨어 있는 건 아닌지—그런 의심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아가 오지 않는 시간이 되면 병실이 더 조용하고 답답하게 느껴진다는 걸 스스로도 부정할 수 없었다. 창밖으로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지아가 그릇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윤은, 문득 자신이 방금 무슨 약속을 받아들인 건지 다시 생각해보았다. 3주. 그 시간이 끝나면, 이 낯선 온기도 함께 사라지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도윤은 스스로도 당황스러워 애써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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