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복도의 정적이 그대로 이어지던 그 순간, 하은은 얼떨결에 한쪽 발을 들어 올려 실내화 밑창을 소야에게 보여주었는데, 새것처럼 깨끗한 그 밑창에는 흙 한 점, 물기 한 점 묻어있지 않았다.
소야는 그 밑창을 확인하듯 짧게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렸는데, 그 순간의 눈빛에는 이미 확신에 가까운 냉정함이 서려 있었다.
윤소야.
곧게 뻗은 어깨선과 흐트러짐 없는 교복 매듭,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훑는 듯한 서늘한 눈매가 먼저 시선을 붙잡는 아이였다. 복도에 모여든 무리들이 저마다 눈치를 살피며 숨을 죽이는 것도, 그 앞에 서면 누구든 먹이사슬의 아래쪽으로 밀려나는 듯한 압도감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공고문 봤어?" 소야가 무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낮게 묻자, 몇몇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고, 그 침묵이 오히려 소야의 말에 무게를 더했다.
"운동장 트랙 페인트, 아직 덜 말랐다고 붙어있던 거." 소야가 짧게 부연하며, 손끝으로 하준을 가리켰다. "수건, 어디 벤치에 놔뒀지?"
하준은 갑작스러운 지목에 흠칫 어깨를 굳혔다가, 무리 속에서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트랙 옆 벤치였는데." 하준이 얼떨결에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소야는 그 대답을 확인한 사람처럼 옅게 고개를 움직였고, 그 표정에는 이미 다음 말을 준비하는 듯한 여유가 배어 있었다.
"그 벤치는 페인트 작업 구역이랑 붙어 있어서, 오늘 아침엔 접근 금지 테이프가 쳐져 있었을 거야." 소야가 담담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복도의 아이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조용히 귀를 기울였는데, 몇몇은 그제야 아침에 스쳐 지나간 노란 테이프의 기억을 떠올리며 낮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테이프가 있었으면 못 지나갔을 텐데." 누군가 작게 중얼거리자, 그 말이 복도 전체에 잔물결처럼 퍼져나갔다.
"누군가 그 수건을 옮기려면 최소한 그 구역 근처는 지나야 했을 텐데." 소야의 시선이 이번엔 에리의 손끝으로 향했고, 그 순간 에리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에리는 순간적으로 손을 주머니 속에 밀어 넣으려 했지만, 이미 옆에 서 있던 아이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손, 보여줄래?" 소야가 조용히 청하자, 에리는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숨기려 했지만, 이미 몇몇 아이들의 시선이 그 손끝에 남은 희미한 붉은 얼룩을 발견한 뒤였다.
정적이 잠시 복도를 무겁게 짓눌렀고, 그 짧은 침묵 사이로 누군가의 숨소리만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이거, 페인트잖아." 무리 중 하나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에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 이건 그냥, 다른 데서 묻은 거야." 에리가 다급하게 손을 감추며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이미 그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고, 몇몇은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에리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다른 데 어디?" 소야가 무심한 듯 되묻는 순간, 에리는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몇 번 벙긋거렸다.
"하은이 신발엔 물기도, 페인트도 없어.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그 구역 근처엔 안 갔다는 뜻이지." 소야가 마지막으로 그 한마디를 덧붙이자, 복도를 채우고 있던 무거운 공기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에리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얼굴을 붉히며 무리를 이끌고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고, 그 뒷모습이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남아있던 아이들 역시 슬금슬금 흩어지며 복도를 빠져나갔는데, 몇몇은 지나가며 하은을 향해 짧게 눈짓을 보내기도 했고, 또 몇몇은 여전히 소야의 존재감에 압도된 듯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복도 한가운데, 하은과 소야만이 남았는데, 하은은 방금 벌어진 일이 실감 나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소야를 바라보았다.
강하은.
작은 체구에 늘 조심스러운 걸음걸이, 그리고 누구에게든 먼저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몸에 붙은 아이였다. 방금 전까지도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 자리에서, 하은은 오로지 자신을 보호하듯 서 있던 한 사람의 뒷모습만을 눈에 담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날 구해줬어.' 하은의 심장이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세차게 뛰기 시작했고, 그 감각은 마치 처음 느껴보는 온기처럼 가슴 안쪽에서부터 번져나갔다.
복도의 창문으로 스며든 오후의 햇살이 소야의 어깨 위로 비스듬히 떨어졌고, 그 빛을 등지고 선 소야의 옆모습이 하은의 눈에는 유난히 또렷하게 새겨졌다.
"저, 선배님." 하은이 다급히 소야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소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방금까지 무리를 향해 서늘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이 순간만큼은 어딘가 낯선 긴장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하은의 목소리가 떨리듯 이어졌고, 그 눈빛에는 이미 감사를 넘어선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소야는 그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는데, 그 반응이 스스로도 낯설다는 듯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별거 아니었어." 소야가 짧게 대답했지만, 그 목소리 끝이 평소와 다르게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에요, 저였으면 그냥 억울하게 넘어갔을 거예요." 하은이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선배님이 아니었으면, 저 아직도 거기 서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 말에 소야는 잠시 시선을 피하며 손끝으로 교복 소매 끝을 무의식적으로 잡아당겼는데, 그 작은 몸짓 하나가 하은의 눈에는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다.
"저, 선배님, 이름이 뭐예요?" 하은이 눈을 반짝이며 다시 한 걸음 다가서자, 소야는 뒷걸음질 치던 발끝이 바닥에 걸려 잠시 균형을 잃을 뻔했다.
"윤, 윤소야." 소야가 얼떨결에 자신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 하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순식간에 환하게 번졌다.
"소야 선배님, 저는 강하은이에요." 하은이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밝히며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저 다시 뵐 수 있을까요?"
그 간절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소야는 목 안쪽이 조여드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소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그대로 복도를 뛰어가버렸고, 그 발소리가 텅 빈 복도에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하은은 그 갑작스러운 도주에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자신도 모르게 그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는데, 왜 뛰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저 멀어지는 뒷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이 다급하게 다리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복도 끝, 계단으로 이어지는 모퉁이에서 소야의 모습이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고, 하은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