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문을 열자 방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문틈으로 들어온 빛이 바닥에 가늘게 퍼졌다. 그 외에는 아무 빛도 없었다.
커튼이 쳐진 창가, 그 앞에 하얀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선우예린이었다.
긴 은백색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희었다. 눈동자는 짙은 남색이었다. 얼굴은 인형처럼 정교했다.
그런데 그 눈이,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문을 조심스레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방바닥은 나무였는데도 발밑이 얼음장 같았다.
"안녕. 나는 강도윤이야. 오늘부터 여기 자주 올 거야."
반응이 없었다.
예린은 창밖을 향해 앉아 있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녀 곁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숨소리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들릴 듯 말 듯한 숨소리가 있었다. 그게 그나마 안심이 됐다.
'살아 있긴 하다는 거지.'
나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날씨 좋다. 밖에 나가면 좋을 텐데."
아무 대답도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책상 위에는 마법 서적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지만, 먼지가 앉은 지 오래된 듯했다. 벽에는 그림 한 점 없었다. 온통 하얗고 차가운 방이었다.
침대 위에는 이불이 흐트러짐 없이 각 잡혀 있었다. 누군가 자고 일어난 흔적이 없었다.
'여기서 자긴 하는 걸까.'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재밌는 이야기 해줄까. 우리 동네에 진짜 무서운 개가 있었는데……."
말을 하다가 스스로 어이가 없어 멈췄다. 이게 무슨 위로가 되겠나 싶었다.
예린의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보지 않았다. 마치 내가 그 방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의자 옆에 놓인 작은 스툴을 끌어와 앉았다. 다리가 짧아 엉덩이가 반쯔 걸린 채로 앉아야 했다.
그래도 눈높이를 맞추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앉았다.
"예린 님. 힘든 거 알아요. 근데……."
말을 잇지 못했다.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려던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바깥에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이 닫혀 있는데도 그 소리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예린은 그 소리에도 반응이 없었다.
나는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커튼 끝이 살짝 흔들렸다.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그 틈으로 들어온 빛 한 줄기가 예린의 뺨을 비스듬히 가로질렀다.
빛을 받아도 그 얼굴엔 그림자 하나 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 얼굴이 저렇게 정적일 수가 있나.'
그러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아보았다. 차가웠다. 사람의 손이 이렇게 차가울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뻣뻣했다. 마치 오래 움직이지 않은 관절 같았다.
예린은 그 손을 빼지도, 잡지도 않았다. 그냥 놓여 있었다.
나는 손끝에 살짝 힘을 주어 감싸 쥐었다. 온기를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오히려 내 손까지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아이는 살아있지 않다.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눈을 뜨고 있지만—살아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껍데기만 남은 사람 같았다. 그 안의 무언가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처럼.
나는 그 자리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해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 안의 어둠이 점점 짙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등불 하나 켜지 않았다. 이 방의 정적을 깨는 게 왠지 무례한 일처럼 느껴졌다.
창밖 하늘이 붉게 물들다가, 다시 회색으로, 그러다 완전히 검게 변했다.
그 시간 동안 예린의 자세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숨소리만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저릿했다. 얼마나 오래 그 자세로 있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오늘은…… 이만 갈게요. 또 올게요."
방을 나서며 나는 문을 조용히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복도의 공기가 방 안보다 훨씬 따뜻하게 느껴졌다.
한지훈이 복도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었다.
"어땠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무 반응도 없었어요. 숨소리만 들렸어요."
한지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다들 그랬어. 첫날은."
"다들이요?"
"학자들도, 마법사들도. 다 그 방에서 나올 때 똑같은 얼굴을 했어."
그가 벽에서 등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나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근데 도윤 님은 다를 줄 알았거든."
"왜요?"
"몰라.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어."
나는 그 말에 뭔가 반발심이 들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다를 거라고 기대했다는 게, 오히려 더 부담스러운데.'
복도를 걷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발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한지훈이 갈라지는 길목에서 멈춰 섰다.
"내일도 갈 거지?"
"네."
"그래. 그럼 내일 보자."
그는 짧게 손을 흔들고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나는 혼자 남은 복도에서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텅 빈 눈동자가 남아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그 텅 빈 눈동자를 계속 떠올렸다.
이불을 덮고 누워도 몸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냥 곁에 있으라고 했는데…….'
곁에 있는 게 저런 거라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았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텐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위로가 안 통했다면, 다른 걸 해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어 방 안을 옅게 물들였다.
그 빛이 문득 예린의 방 창가로 스며드는 빛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달빛인데 왜 그 방에서는 그렇게 차가워 보였을까.'
답이 나올 리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감은 눈 안쪽에서도 그 무표정한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일은 뭘 해야 하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손을 잡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이미 해봤다.
'뭔가... 그 애가 반응할 만한 게 있을 텐데.'
나는 그날 밤 늦게까지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새벽이 오기 전, 어렴풋한 잠 속에서도 그 짙은 남색 눈동자가 자꾸만 나를 향해 떠올랐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