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년 반 만의 미소

4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별채를 찾았다. 결과는 매번 같았다. 예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향해 앉아 있었다. 별채는 본채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담쟁이넝쿨이 벽을 절반쯤 덮고 있었고, 창문은 늘 반쯤 닫혀 있었다. 그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방 안을 반만 밝혔다. 예린이 앉은 자리는 늘 그 빛의 경계선 위였다. 밝음과 어둠, 그 사이 어딘가. 나는 매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훈련장에서 있었던 우스운 일. 동기 하나가 표적을 잘못 봐서 교관 얼굴에 화살을 쏠 뻔했던 이야기. 지방에 있을 때 겪었던 사고. 시장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좌판 전체를 뒤엎었던 이야기. 동기들끼리 벌인 장난. 밤중에 몰래 술을 훔쳐 마시다 걸려서 단체로 벌을 받았던 이야기. 나는 손짓까지 곁들여가며 떠들었다. 목소리를 높였다가 낮췄다가, 웃음소리를 흉내내기도 했다. 혼자서 웃고, 혼자서 진지해지고, 혼자서 이야기를 끝맺었다. 아무것도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한지훈은 나를 볼 때마다 물었다. "오늘은 어땠어?" "똑같아요." 그때마다 그의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안심이 동시에 스쳤다. 실패해도 어쩔 수 없다는 안심, 그리고 그게 자꾸 반복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나는 그 표정이 싫었다. 싫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 얼굴을 볼 때마다 뭔가가 가슴 안쪽에서 조용히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내가 실패할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그런데도 시도해봐 줘서 고맙다는 듯한 표정. 그 두 가지가 한 얼굴에 동시에 떠 있는 걸 보는 게 매번 힘들었다. 일주일째 되던 날 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방 안은 어두웠다. 창밖에서 벌레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 채 눈을 감지 않았다. '위로는 안 통해. 조언도 안 통해. 웃음도 안 통해.' 생각이 하나씩 정리됐다. '그럼 뭐가 통할까.' 나는 지난 일주일을 다시 되짚어봤다. 위로하는 말을 건넬 때 예린의 눈은 미동도 없었다. 앞으로 나아질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스운 이야기를 할 때조차 그 눈은 창밖만 향해 있었다. '전부 다, 그 애가 반응할 이유가 없는 것들이었어.' 나는 어릴 때를 떠올렸다. 지방 마을에 있을 때, 나는 늘 도망 다니는 아이였다. 어른들 눈을 피해 도망치고, 형들 손을 피해 도망치고, 무언가에 쫓기면 웃으면서 도망쳤다. 그게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아이들이 나를 놀리려고 잡기 놀이를 걸었을 때, 나는 도망치면서도 이상하게 신이 났던 기억이 있었다. 처음엔 억울했다. 나를 골탕 먹이려고 시작한 놀이였으니까. 그런데 골목을 몇 번 돌고 나니 이상하게 웃음이 터졌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놀이가 되는 순간이었다. 잡히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뛰던 그 감각, 심장이 뛰는 게 무섭지 않고 오히려 즐거웠던 그 순간. 그 감각이 문득 떠올랐다. '위로가 아니라, 도전이라면?'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른 채, 나는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짚어봤다. 예린은 지금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사람이 정말로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살아있는데, 눈을 뜨고 있는데, 정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뭔가는 남아 있을 거야. 반드시.' 그 뭔가를 건드릴 방법이, 위로도 조언도 아니라면. 나는 밤새 잠을 설쳤다. 몇 번이나 뒤척이다가, 결국 동틀 무렵에야 겨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나는 별채로 향하는 길에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실패할 게 뻔한데도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걸음이 빨라졌다.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긴장됐는데, 그 긴장이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느껴보는 종류의 두근거림이었다. 별채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걸으며 나는 몇 번이나 혼자 중얼거렸다. '말이 안 되는 짓이야.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잖아.' 방문 앞에 서서, 나는 평소처럼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 대신 문을 두드렸다. 세게. 몇 번이고. "예린 님!"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늘 그랬듯이. 나는 문을 벌컥 열었다. 예린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얀 얼굴, 창밖으로 향한 눈동자,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진 손. 며칠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외쳤다. "귀신잡기 하자!" 방 안의 정적이 순간 흔들렸다. 착각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를 잡아봐. 못 잡으면 내가 이기는 거야!" 목소리가 방 안에 부단히 울렸다. 나는 팔을 벌리고 몇 걸음 방 안으로 들어섰다. 창가로, 벽 쪽으로, 다시 문 쪽으로. 마치 정말 놀이를 하듯 움직였다. 한지훈이 이 상황을 봤다면 당장 나를 끌어냈을 게 분명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라고, 자극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던 걸 나는 다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예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정말 아주 조금, 눈동자의 초점이 처음으로 나를 향한 것 같았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봤어? 방금 봤어?'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혹시라도 움직이면, 그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돌아갈까 봐. 나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 짧은 순간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그녀의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뭔가 무거운 것이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등불도 켜지 않은 방인데 어딘가에서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벽을 타고 흐르는 것 같기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한 그 진동. 나는 그 느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닐까.' 머릿속으로 경고음이 울렸다. 지금이라도 물러서야 하는 거 아닐까. 이대로 계속 자극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하지만 이미 말은 뱉어졌고,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예린의 손끝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릎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그 손끝이, 아주 조금씩, 마치 오랫동안 굳어 있던 관절이 처음 움직이려는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림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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