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목요일의 간식 침입자

1화

내 이름은 이준서다. 한빛고등학교 1학년 3반. 이 소개만 들으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없다. 진짜 없다. 성적은 중간, 얼굴은 평균, 특기는 존재감 지우기. 담임선생님도 출석부를 부를 때마다 한 번씩 내 이름 앞에서 멈칫한다. "어... 이준서, 있지?" 하고 반을 둘러보는 그 짧은 침묵. 그게 내 인생을 요약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게 소설이라면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지나가는 반 친구 3번쯤의 위치일 거다. 대사도 한 줄 없이, 이름조차 나오지 않고 "그리고 다른 학생들도" 정도로 처리되는 그런 배경 인물. 억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편했다. 조연은 안 죽으니까. 조연은 사건에 휘말리지 않으니까. 조연은 그냥 조용히 학교 다니다가 조용히 졸업하면 되는 거니까. 적어도 그날 오후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방과후 복도는 늘 그렇듯 텅 비어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리며 낮게 웅웅거렸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이미 주황빛으로 기울어 있었다. 청소 당번들이 신발주머니를 끌고 지나간 자국이 바닥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가방을 메고 계단 쪽으로 걸었다. 목요일이었다. 목요일은 내게 특별한 날이다. 왜냐면 매점에서 산 딸기맛 초코바를 아무한테도 안 뺏기고 혼자 다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니까.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진 짝지 녀석이 매점 갈 때마다 나를 따라붙는데, 목요일은 그 애가 학원 상담이 있어서 일찍 집에 간다. 그러니까 목요일 방과후는, 나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가방 앞주머니에는 이미 초코바가 들어 있었다. 손끝으로 포장지 모양을 더듬으며 걸었다. 별거 아닌 걸 알지만, 나한테는 별거였다. 그때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소리가 난 방향을 봤다. 하늘색 케이스. 곰돌이 인형 스트랩이 달린 스마트폰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케이스 모서리가 살짝 까진 게 보였다. 얼마나 오래 썼는지, 스트랩의 곰돌이 인형도 색이 조금 바래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주워들었다. 화면은 아직 켜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앞을 봤다. 걷고 있는 여자애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긴 머리카락이 걸음에 맞춰 살짝 흔들렸고, 교복 치마 밑으로 뻗은 다리는 곧고 길었다. 걸음걸이만 봐도 자신감이 넘쳤다. 세상 무서운 게 하나도 없다는 걸음걸이였다. 나는 그게 누군지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 학년에서 저런 뒷모습을 가진 애는 딱 한 명뿐이었으니까. 강나윤. 학년 최고의 미소녀, 인싸 중의 인싸, 얼굴만 알아도 SNS 팔로워가 늘어난다는 전설의 그 강나윤. 복도를 걸으면 남자애들이 슬쩍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 여자애들끼리는 그 애 이야기를 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나 같은 배경 인물하고는 우주가 다른 존재였다. 심장이 갑자기 빨라졌다. 왜 떨려. 그냥 스마트폰 하나 돌려주는 거잖아. 나는 나 자신에게 몇 번이나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저, 저기요."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낸 소리인데도 낯설게 들렸다. 그녀가 돌아봤다. "어어?"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자기 손을 확인하더니 화들짝 놀랐다. "헐, 내 폰!" 뛰어와서 내 손에서 스마트폰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사진보다 훨씬 더... 뭐랄까, 생생했다. 화면 속 인물이 갑자기 입체로 튀어나온 느낌이었다. 그 순간, 화면이 켜져 있었다. 받아가는 손짓 때문에 잠금이 풀린 건지, 원래 켜져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메시지창이 그대로 떠 있었다. 『야 오늘 학주 앞에서 완전 착한척 오지게 했다 ㅋㅋ 나 진짜 배우 해도 됨』 나는 그걸 봤다. 정확히, 완벽하게 봤다. 글자 하나하나가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학주. 착한척. 배우. 세 단어가 머릿속에서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그녀도 그걸 눈치챘다. 내가 화면을 보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화면에 뭐가 떠 있는지를 자기도 확인하는 그 짧은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화면과 내 얼굴을 번갈아 오갔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복도의 형광등 웅웅거리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너......"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방금까지의 명랑한 톤과는 완전히 다른, 서늘한 저음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그런 목소리. "봤어?"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목이 딱 막혔다. 머릿속은 하얗게 비었는데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발바닥이 바닥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또각. 구두 소리 하나가 복도에 울렸다. 나는 그 소리에 몸이 저절로 굳었다. "너, 이름이 뭐야?" "이, 이준서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가 이렇게 겁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이준서." 그녀가 내 이름을 곱씹었다. 마치 처음 보는 단어를 발음해보는 것처럼, 천천히, 한 글자씩. 그러곤 갑자기, 방금 전까지의 서늘한 표정이 싹 사라지고 활짝 웃었다. 학교에서 흔히 보던 그 밝은 미소였다. 눈이 반달처럼 접히고, 입꼬리가 예쁘게 올라가는, SNS에서 몇 번이나 봤던 딱 그 얼굴. 하지만 나는 방금 그 얼굴 밑에 뭐가 있었는지 봐버린 뒤였다. "오케이, 이준서. 우리 얘기 좀 해야겠다." 그 말이 왜 이렇게 무섭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뇌 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이건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야. 그 목소리는 내 안의 내레이터 같은 거였다. 언젠가부터 내 머릿속엔 이런 목소리가 산다. 상황을 실황 중계하는 것 같은, 딱 성우 톤의 목소리. 처음엔 그 목소리를 김도현 성우님 톤이라고 상상했었는데, 곧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김도현 성우님은 목소리가 너무 중후하다. 내 상황엔 안 맞는다. 나는 그냥 어중간한 조연이니까, 목소리도 어중간해야 맞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그 목소리를 그냥 '내레이터'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름도 없고, 성격도 없고, 그저 상황을 설명해주는 존재. 지금 그 내레이터가 말하는 걸 보면, 이건 확실히 뭔가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강나윤이 내 팔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그 온도차에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따라와." "어, 어디를요?" 목소리가 다시 떨렸다. 나는 그 순간에도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왜 이렇게 겁먹은 소리가 나오는 건데. "옥상." 그 한마디에 담긴 무게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옥상이라는 단어는 학교에서 늘 뭔가 은밀하고,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장소로 알려져 있었다. 누가 맞았다더라, 누가 고백했다가 차였다더라, 하는 소문들이 전부 그곳에서 시작됐다.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나를 끌고 갔다. 손목을 잡은 손이 생각보다 세게 조여왔다. 나는 반쯤 끌려가듯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나는 딱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이 목요일은 이제 망했다. 가방 앞주머니 속 딸기맛 초코바가 그렇게 슬프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오늘은 혼자 다 먹을 계획이었는데, 그 계획이 지금 이 순간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다. 계단을 다 오르자 옥상으로 나가는 철문이 보였다. 평소엔 늘 잠겨 있다고 알던 문인데, 이상하게 살짝 열려 있었다. 바람이 그 틈으로 새어 들어와 내 발목을 스쳤다. 강나윤이 그 문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끼익- 낡은 철문이 낮게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확신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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