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찰박.
낙엽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유한별의 뒤통수를 보며 뛰었다. 후드를 눌러쓴 뒷모습이 안개 속으로 자꾸 흐려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리가 무거웠다.
"거기 좀 천천히 가!"
"입 다물고 따라와요."
한별의 목소리가 앞에서 날아왔다.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는 대꾸할 힘도 없이 그저 발을 굴렀다.
산속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새소리도 없고, 벌레 소리도 없고, 오직 우리 둘의 발소리와 숨소리만 안개 사이로 울렸다. 그 정적이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저기다."
한별이 낮게 말했다.
앞쪽 나무들 사이로 붉은 것이 보였다. 등산복.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어이, 괜찮아요?"
나는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대답이 없었다. 심장이 빨라졌다. 관자놀이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가까이 갔다. 등산객이었다. 사십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 배낭을 멘 채, 눈을 뜬 채로 굳어 있었다.
죽은 게 아니었다. 숨은 쉬고 있었다. 가슴이 오르내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사진 속에 갇힌 사람처럼.
"뭐야 이거."
나는 뒷걸음쳤다.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손대지 마요."
한별이 내 팔을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그때 나무 위에서 그림자가 떨어졌다.
쿵.
땅이 흔들렸다. 발밑에서 진동이 올라왔다.
팔이 세 개였다. 3미터는 되어 보이는 몸. 탄내가 코를 찔렀다. 마치 뭔가를 태운 뒤 남은 재 냄새 같았다.
"척괴인."
한별이 중얼거렸다.
지난번 학교 뒷골목에서 본 것보다 컸다. 훨씬. 저번엔 그래도 3미터 정도였는데, 이건 나무 위로 머리가 솟아 있었다.
"저번 거랑 다른데."
나는 침을 삼켰다.
"등급이 달라요."
한별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 듣는 떨림이었다.
괴인이 세 번째 팔을 휘둘렀다. 나무 한 그루가 통째로 부러졌다.
콰직.
부러진 나무가 우리 쪽으로 쓰러졌다.
"도훈씨, 뒤로."
한별이 나를 밀쳤다.
나는 넘어졌다. 팔꿈치가 다시 까졌다. 저번에 생긴 상처 바로 옆이었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씨, 아파."
나는 팔꿈치를 붙잡고 뒤로 굴렀다. 흙 냄새가 코에 가득 찼다.
한별은 이미 손을 들고 있었다. 후드 아래로 보이는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중력의 이름으로."
빛이 번졌다. 후드가 사라지고 흰 드레스가 나타났다. 검은 리본, 검은 마스크. 빛이 사그라들자 그 자리엔 전혀 다른 존재가 서 있었다.
낙성소녀 별지기였다.
"별지기."
나는 그녀를 불렀다. 학교에서와는 다른 이름. 협박자와 협박받는 자가 아니라, 지금은 사냥꾼과 사냥감이 싸우고 있었다. 그 낙차가 매번 낯설었다.
괴인이 포효했다. 소리가 산을 흔들었다. 귀가 먹먹해졌다.
한별의 손끝에서 뭔가가 응축됐다. 공기가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마치 렌즈 하나를 눈앞에 대고 보는 것처럼 배경이 휘었다.
"압착."
괴인의 몸이 순간 눌렸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우드득. 소리만으로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괴인은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눌린 몸을 다시 펴며 앞으로 걸어왔다.
"저번보다 세."
한별이 헐떡였다. 드레스 자락이 땀에 젖어 다리에 붙어 있었다.
"질 것 같아?"
나는 나무 뒤에서 물었다. 목소리가 저절로 낮아졌다.
"모르겠어요."
그 대답이 더 무서웠다. 평소라면 콧방귀라도 뀌며 이길 거라고 큰소리쳤을 그녀가, 지금은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괴인이 세 번째 팔로 땅을 짚고 도약했다. 육중한 몸이 순식간에 허공을 갈랐다. 한별이 옆으로 굴렀다. 드레스 자락이 흙에 끌렸다. 그녀가 착지하자마자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 순간, 나뭇가지 사이로 검은 코트가 스쳤다.
조사관이었다.
"물러서십시오."
그가 낮게 말했다. 억양 하나 없는 목소리였다.
한별이 그를 힐끗 봤다. 눈빛에 짜증과 반가움이 뒤섞여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
"조사 중입니다."
조사관은 짧게 답했다. 시선은 이미 괴인을 향해 있었다.
"조사만 하고 안 도와줄 거예요?"
한별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규정상."
"규정 좀 치워요!"
괴인이 다시 달려들었다. 한별이 손을 뻗었다.
"중력 반전."
괴인의 몸이 순간 하늘로 떠올랐다. 나뭇잎이 거꾸로 날렸다. 밑에서 위로 흩날리는 낙엽들이 마치 필름을 거꾸로 돌린 것 같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숨을 죽였다. '진짜 마법이구나.'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매번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괴인이 다시 떨어졌다.
쾅.
지축이 흔들렸다. 나뭇가지 몇 개가 떨어져 내렸다. 이번엔 검은 재가 조금씩 피어올랐다. 하지만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다. 재가 다시 몸으로 모여들며 형체를 되찾았다.
"안 죽어."
한별이 이를 악물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숨을 몰아쉬는 게 여기까지 들렸다.
조사관이 그제야 움직였다. 코트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검은 막대 같은 물건이었다. 손바닥만 한 길이였다.
"이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만."
그가 나직이 말했다.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고.
그가 막대를 괴인 쪽으로 던졌다. 막대가 땅에 박히자 파란 빛이 번졌다. 빛이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괴인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뭘 한 거예요?"
한별이 물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눈은 조사관을 향해 있었다.
"움직임을 늦추는 장치입니다."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쓰라고요!"
한별이 소리쳤다.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눈이 매섭게 조사관을 쏘아봤다.
"규정상 최후의 수단입니다."
"당신 규정 책자는 다 태워버려야겠어요."
한별이 뭐라고 쏘아붙이려다 말았다. 대신 괴인 쪽으로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엔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게 보였다.
"이번엔 끝내요."
괴인이 느려진 틈을 타 한별의 손끝에서 빛이 뭉쳤다. 아까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공기가 무겁게 짓눌리는 게 느껴졌다. 내가 서 있는 곳까지 압력이 전해졌다.
나는 그 순간 한별의 표정을 봤다.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힘을 짜내는 게 아니라, 뭔가를 참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이를 악문 턱,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
'왜 저래.'
의문이 들었지만 물을 틈이 없었다.
"별의 무게로."
한별이 외쳤다. 목소리가 산을 뚫고 나갈 만큼 컸다.
괴인의 몸 전체가 짓눌렸다. 이번엔 완전히 뭉개졌다. 뼈와 살이 압축되는 소리가 짧게 울리고,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검은 재가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재는 바람을 타고 나무 사이로 퍼져나가다가,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괴인이 사라진 자리, 등산객 남자는 여전히 눈을 뜬 채 굳어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이 사람은 왜 저래요?"
나는 물었다. 조심스레 남자에게 다가가며.
조사관이 다가와 남자의 상태를 살폈다. 손목을 짚어보고,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고. 남자는 반응이 없었다.
"영혼 흡수 흔적입니다."
그가 말했다.
"영혼을요?"
나는 되물었다.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척괴인의 새로운 유형인 듯합니다."
조사관이 담담하게 답했다. 마치 날씨 얘기하듯이.
한별이 변신을 풀었다. 다시 후드를 눌러쓴 모습으로 돌아왔다.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 턱 밑으로 떨어졌다.
"괜찮아?"
내가 다가가 물었다.
"괜찮아 보여요?"
한별이 쏘아붙였다. 하지만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저번 것과는 목적이 다릅니다."
조사관이 낮게 말을 이었다. 여전히 남자의 상태를 살피며.
"뭘 노리는 건데요."
조사관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 시선이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당신에게도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별이 내 옆으로 다가섰다. 조사관과 나 사이를 가로막듯이.
"제 옆 사람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관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조사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미묘한 무게가 실렸다.
나는 그 순간 등산객의 굳은 눈동자와, 조사관의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가 겹쳐 보였다. 둘 다 뭔가를 감추고 있는 눈이었다.
산속 안개가 더 짙어졌다. 우리 세 사람의 그림자만 어둠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