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옥상 바람이 차가웠다. 늦봄인데도 아직 겨울의 끝자락이 남아 있는 것처럼, 살갗을 스치는 바람 끝에 날이 서 있었다. 나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눈물을 삼켰다. 콘크리트 바닥의 냉기가 청바지 밑으로 스며들어 허벅지까지 올라왔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강태오는 여전히 담벼락에 기대어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가 나를 의식하지 않는 건지, 의식하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옥상 난간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회색빛이었고,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마치 오늘 하루의 내 마음 같았다.
한참 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라는 짧은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시 말했다. 여기서 그렇게 울면, 감기 걸려. 목소리에 걱정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대답했다. 상관 마세요. 목소리가 예상보다 날카롭게 나갔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곁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살짝 들어 보였다. 그러든가. 그러고는 다시 하늘을 보았다. 그 무심함이 이상하게 서러웠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두고 수많은 말을 쏟아내는데, 이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게 왜 이렇게 눈물이 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교복 재킷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 바람에 흔들리는 앞머리. 그는 정말로 나 같은 건 관심도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걸까. 다른 곳도 많은데, 왜 하필 내가 숨어든 이 옥상에.
나는 결국 무너졌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 순간 억눌러온 말들이 터져 나왔다.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누구랑도 안 잤어요. 그런 짓 할 시간도 없어요. 나는 목소리가 갈라지는 걸 느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오늘 아침,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온 수군거림이 떠올랐다. 걔 있잖아, 밤에 남자랑 있는 거 봤대. 누가, 어디서. 몰라, 그냥 그런 소문이 돌던데. 얼굴도 모르는 애들이 나를 두고 마음대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 있었다.
아빠는 집 나갔고, 엄마는 병원에 있고, 나는 동생 밥 차려주고 알바하느라 남자 만날 시간도 없는데. 그런데 다들 나를 이상한 여자로 만들어요. 왜요, 도대체 왜.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지 벌써 삼 년째였다. 나는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동생 도시락을 싸고, 학교가 끝나면 편의점으로, 편의점이 끝나면 다시 병원으로 뛰어다녔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내가 밤마다 놀러 다닌다고, 남자를 갈아치운다고, 입에 담기도 싫은 말들을 만들어냈다. 도대체 언제, 무슨 시간에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건지.
말을 쏟아내고 나니 숨이 가빠졌다. 나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떨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크게 울었다. 위로를 바란 것도 아닌데, 누군가 내 말을 그냥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뭔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무릎에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옷감에 스며들어 짙은 얼룩을 만들었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들이었다. 친구들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심지어 병원에 있는 엄마에게도 하지 못한 말들.
한참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다가와 내 옆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가 완전히 자리에 앉고 나서야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눈빛이 조금 달랐다. 조금 전까지 하늘을 보던 눈빛과는 다른, 뭔가를 응시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이라고 그가 말을 꺼냈다. 소문 같은 거 안 믿어. 원래 사람들 말이라는 게 다 헛소리니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그 안에 어떤 확신이 담겨 있었다. 나는 콧물을 훌쩍이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요. 왜 안 믿는데요. 내 목소리에는 의심이 섞여 있었다. 이 남자가 나를 위로하려고 아무 말이나 던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너 매일 아침 일곱 시에 편의점 앞에서 삼각김밥 사가는 거 봤어. 동생 도시락 싸주려고 새벽에 나오는 것도 봤고. 그런 애가 밤마다 딴 데 다닐 시간이 있겠어. 그는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키는 시늉을 했다. 우리 집 창문에서 편의점 앞 골목이 보여. 매일 비슷한 시간에 네가 지나가더라. 삼각김밥 두 개, 우유 하나. 늘 똑같이.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가, 이 무심해 보이는 남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낯설고 이상했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자세히 봐준 적이 있었나. 소문이 아니라, 진짜 나를. 가슴 안쪽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올랐다. 그동안 나는 투명 인간처럼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아무도 내 사정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는 이 남자는 나의 일상을 조각조각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바지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대충 쓸어내리는 동작이 어딘가 무심했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사람들은 금방 다른 얘깃거리로 넘어가. 그게 위로인지 냉정한 사실 전달인지 헷갈렸지만, 나는 그 말이 이상하게 힘이 되었다. 마치 세상 물정을 다 안다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배려가 조금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계단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 서서 뒤돌아보았다. 참고로, 라고 그가 말했다. 나 너네 위층 살아. 302호. 알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알아요, 라고 겨우 대답했다. 사실은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순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답이 나왔다. 아니, 어쩌면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계단에서 몇 번 스쳤던 것 같기도 하고,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을 때 그가 앞서 올라가던 뒷모습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발소리가 계단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가 사라진 계단 입구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눈물은 멈췄는데, 가슴 속에서 뭔가가 계속 뛰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 소문이 아닌 진짜 나를 봐준 게.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눈가는 아직 붓기가 남아 있었지만, 마음은 조금 전보다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강태오라는 이름을 계속 떠올리게 되었다. 302호. 나는 그 숫자를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교실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더 커진 소문이었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순간 정적이 흘렀다가 다시 수군거림이 시작되었다. 누군가 내가 옥상에서 강태오와 단둘이 있는 걸 봤다고 떠벌리고 있었다. 뭐라고, 강태오랑? 진짜야? 옥상에서?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쏟아졌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이번엔 강태오까지 소문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나를 감싸주었던 그 짧은 순간이, 또 다른 오해의 씨앗이 되어 교실을 떠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