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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임신이라는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아무 근거도 없는 말인데도, 그 말이 학교 전체를 돌아다닐 걸 생각하면 속이 뒤틀렸다. 이런 식이면 강태오한테까지 피해가 갈 거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앉았다. 방 안은 어두웠다.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어 벽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 그림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왜 하필 나일까. 왜 하필 지금일까. 엄마가 병원에 있는 이 시기에, 왜 이런 일까지 겹쳐야 하는 걸까. 생각할수록 답이 없는 질문들만 머릿속을 헤집었다.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켰다. 다은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나는 다시 화면을 끄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눈을 감으면 교실에서 나를 힐끔거리던 눈빛들이 떠올랐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인데, 벌써부터 그 시선들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몇 번이나 뒤척이다가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 다음 날 등교하는 길,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걸었다. 발걸음은 평소와 같은 속도로, 표정도 평소와 같이 무심하게. 하지만 속으로는 계속 되뇌고 있었다. 별일 아니야, 그냥 헛소문일 뿐이야. 교문을 지나 신발을 갈아 신는 그 짧은 순간에도 지나가는 애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나는 조금 안심하며 계단을 올랐다. 하지만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미 그 소문이 반 전체에 퍼져 있다는 걸. 문을 열자 순간적으로 조용해지는 공기가 느껴졌다. 몇몇 애들이 노골적으로 내 배를 힐끔거렸다. 어떤 애는 옆자리 친구에게 귓속말을 하다가 나를 보고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나는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손끝이 떨렸다. 책상 위에 손을 올려두었는데도, 그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몇 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나는 교과서를 펼쳤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뒤에서 누군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임신이라니, 그것도 강태오랑. 웃기지도 않아. 나는 못 들은 척 페이지를 넘겼지만, 손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다은이 헐레벌떡 뛰어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숨이 거칠었다. 야, 이거 진짜 도가 지나쳤어. 누가 시작했는지 알아냈어. 3반 김지현이라는 애가 자기 친구한테 카톡으로 보낸 게 퍼진 거래. 나는 멍하니 다은을 바라보았다. 왜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요. 다은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몰라, 그냥 재밌으니까 그러는 거 아닐까. 근데 이건 진짜 선 넘었어. 태오한테도 얘기했는데 걔도 화났어. 나는 태오가 화가 났다는 말에 이상하게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나 때문에. 다은은 내 표정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설마 신경 쓰는 거야.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며칠 지나면 다들 잊어.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소문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나는 이미 여러 번 겪어 알고 있었다. 점심시간, 나는 밥을 먹는 대신 다시 옥상으로 향했다. 혼자 있고 싶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옥상 문을 밀자 바람이 먼저 얼굴에 닿았다. 그런데 문을 열자 이미 누군가 그곳에 서 있었다. 강태오였다. 그는 난간에 팔을 걸치고 먼 하늘을 보고 있다가 나를 보고도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발걸음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나온 말은 뻔한 사과였다. 저, 소문 얘기 들었어요. 미안해요, 저 때문에. 그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 낮게 말했다.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야. 근거도 없는 소리 지어낸 애들이 문제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랑 자꾸 얽혀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냥 저랑 좀 거리를 두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말을 하면서도 내 목소리가 떨리는 걸 느꼈다. 이 말을 하는 게 맞는 걸까. 그가 정말로 나에게서 멀어지길 바라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라면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나 때문에 이상한 소문에 휘말리는 게 싫었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물었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원하지 않았다. 그 순간 옥상의 바람 소리만 크게 들렸다. 그는 내 침묵을 지켜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소문 때문에 사람 만나고 안 만나고 정하는 거 안 해. 그런 식으로 사는 거 이미 지쳤거든. 나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어떤 피로 같은 게 섞여 있었다. 평소의 그 무심하고 여유로운 말투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하도 이사를 다녀서 매번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소문 속에 던져지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낯선 학교, 낯선 얼굴들, 그리고 그 속에서 또다시 시작되는 뒷말들. 그가 그런 걸 몇 번이나 겪었을지 상상하니 마음이 저려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저랑 있는 게 괜찮다는 거예요. 그는 잠깐 나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뭐, 나쁘진 않아. 짧은 대답이었지만 나는 그 말에 온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나쁘지 않다는 말이 이렇게 큰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바람이 옥상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의 옆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먼 곳을 보고 있었지만, 조금 전보다는 표정이 풀어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순간이 조금 더 길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문도, 학생부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이 옥상에서 바람만 맞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옥상 문이 벌컥 열렸다. 다은이 헉헉거리며 뛰어들어왔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야, 큰일 났어. 나는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다은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학생부장이 지금 이 소문 때문에 서윤이 너 부른대. 부모님도 학교로 오라고 했다는데. 나는 순간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엄마는 병원에 있어서 올 수 없었다. 아빠는, 아빠에게는 이런 일로 연락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이 학생부까지 갔다는 건, 소문이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지점까지 갔다는 뜻이었다. 누가 그런 것까지 알렸을까. 누가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만든 걸까. 나는 강태오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나쁘지 않다고 말하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다은을 향해 낮게 물었다. 언제 오라는 거야. 다은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지금, 지금 당장 오래. 나는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옥상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학생부실 문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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