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율법으로 추방이라니

1화

달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나는 신발을 손에 든 채 맨발로 복도를 걸었다. 마루가 삐걱거릴까 봐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발바닥에 닿는 나무 바닥이 차가웠다. 겨울도 아닌데 이렇게 차가울 일인가. 아마 내가 얼어붙은 거겠지. 서가의 밤은 낮보다 무서웠다. 낮에는 그저 무시당하면 그만이지만, 밤에 들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낮의 무시는 익숙해서 아무렇지 않은데, 밤의 들킴은 다른 문제였다. 왜, 안 그러겠어. 밤중에 몰래 나가는 딸을 좋게 봐줄 부모가 어디 있겠어. 계단 하나를 내려설 때마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어머니 방 앞을 지날 땐 숨조차 참았다.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불빛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뺐다. 뒷문을 빠져나와 야산 쪽으로 뛰기 시작하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밤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게 이상하게 시원했다. 서가 안에 있을 때는 늘 숨이 막혔는데, 이 담을 넘는 순간부터는 다른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서가 뒤편의 오래된 사당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었다. 원래 영수를 모시던 자리였다는데, 지금은 다들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하긴 요즘 세상에 영수를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다들 모르니까 좋았다. 나만 아는 비밀이었으니까. 이 집안에서 나만 갖고 있는 게 있다는 사실이, 그것만으로도 나는 조금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사당 문턱을 넘어서자 안쪽, 은빛으로 흐릿하게 빛나는 형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어." 라온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사람의 것과는 조금 다른, 여러 겹의 소리가 겹쳐 울리는 듯한 음성. 별을 담은 눈이 나를 향해 천천히 깜빡였다. "오늘은 어머니가 늦게까지 안 자서요." "들키면 어쩌려고." "안 들켰으니까 괜찮잖아요." 라온은 짧게 코웃음 쳤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한숨 같기도 한 소리였다. 은빛 털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고, 그 형체는 사슴을 닮았지만 사슴이라 부르기엔 너무 컸고, 늑대를 닮았지만 늑대라 부르기엔 눈빛이 너무 맑았다. 대현국을 지킨다는 영수. 그 존재가 하필 나를 골라 마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처음엔 나도 믿기지 않았다. 산에서 다친 새 한 마리 살려보겠다고 손 뻗은 게 다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은빛 짐승이 나타나 내 앞에 앞발— 아니 발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그것을 들이밀 줄 누가 알았겠어. "이리 와." 라온이 그 발을 살짝 들어 보였다. "오늘은 지혈부터." 나는 사당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돌바닥이 차가워서 엉덩이가 시렸지만 이제는 그것도 익숙했다. 손바닥을 펴서 라온이 가르쳐준 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처음 배울 땐 손끝이 다 저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는데, 이제는 조금 익숙했다. 숨을 천천히 내쉬고, 머릿속을 텅 비우고, 그저 손바닥에 온기가 모이는 걸 느끼기만 하면 됐다. 말은 쉬운데 처음엔 이게 왜 그렇게 안 됐는지. 은은한 온기가 손바닥에서 피어올랐고, 그 빛이 상처 없는 내 팔뚝 위를 훑고 지나갔다. 빛이 스칠 때마다 살갗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따뜻한 것 같기도 한, 묘한 감각이 남았다. "늘었네." 라온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이 존재는 칭찬에 후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몇 달인데 칭찬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니 이 한마디가 얼마나 큰 건지 나만 알았다. "저 원래 손재주 좋아요." "손재주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였다는 얘길 몇 번을 해야 알아듣지."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마음이 엉망이었으니까. 손끝에 힘을 모으려 해도 자꾸 잡생각이 끼어들었다. 언니는 오늘 또 뭘 했을까, 어머니는 오늘도 날 둘째라고 불렀지, 아버지는 여전히 내 이름조차 모르시겠지.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으면 손바닥의 온기는 좀처럼 피어오르지 않았다. 서가의 차녀. 그게 내 이름보다 먼저 붙는 수식어였다. 언니 서지수는 미모도, 재능도, 애교도 다 갖췄고 나는 그 옆에서 늘 흐릿한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어머니 한소영은 나를 부를 때 이름 대신 "둘째"라고 했다. 아버지 서준혁은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 집안 어른들 앞에서 인사를 시킬 때조차 "이쪽은 지수, 그리고 저쪽은—" 하고 말끝을 흐리는 게 전부였다. 나는 그 말끝의 여백에 항상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야산에서 다친 새를 살려보겠다고 손을 뻗은 날, 그 손끝에서 이상한 온기가 피어났고, 그 온기를 알아본 존재가 바로 라온이었다. "신기한 아이네." 라온이 그때 나를 보며 처음 한 말이 그거였다. "마음이 이렇게 엉망인데 손끝은 이렇게 맑다니." 그 말이 뭔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나는 상처받는 데는 익숙했지만, 남을 상처 주는 데는 서툴렀다. 그게 아마 라온이 본 '맑음'이었을 것이다. "오늘은 좀 더 해볼까." 라온이 몸을 낮췄다. 별을 담은 눈이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는 그냥 이 정도면 충분한데요." "충분한 게 아니라 안전한 정도지. 넌 더 배워야 해." "왜요?" 라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사당 밖, 어둠이 깔린 숲 쪽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평소라면 대답을 안 해줘도 그냥 넘어갔을 텐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눈빛이 조금 더 무거웠다. "라온?" "아니야. 계속하자."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도 대답을 잘 안 해주는 존재였으니까. 이런 존재랑 몇 달을 같이 지내다 보면 어디까지 물어봐도 되는지 대충 감이 잡히는데, 오늘은 그 선을 넘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저 다시 손끝에 힘을 모으고, 라온이 가르쳐주는 대로 호흡을 맞췄다. 그날의 훈련은 평소보다 길었다. 같은 동작을 몇 번이고 반복시켰다. 지혈에서 시작해, 상처를 감지하는 것, 그리고 짧은 방어의 결. 순서도 없이 이것저것 섞어서 시키는 게 아니라, 마치 뭔가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순서를 정해두고 하나씩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이거 왜 이렇게 열심히 시켜요, 오늘?" "열심히 안 하면 안 배워지는데." "그건 맞는데 평소랑 뭔가 다르잖아요. 라온 표정이." "내 표정이 뭐." "평소보다 딱딱해요." 라온은 잠시 말이 없다가, 별을 담은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 "기분 탓이야." 기분 탓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았다. 그런데도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이 존재의 침묵에는 늘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를 억지로 파고들었다가 좋은 꼴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훈련이 끝날 무렵엔 손목이 다 저릴 정도였다. 손바닥을 몇 번이나 접었다 펴며 감각을 되찾으려 애썼다. "다음엔 조금 더 일찍 와." 라온이 말했다. "늦게 나오다가 정말 들키면 그땐 나도 못 도와줘." "네, 노력해볼게요." 노력이라는 말은 참 편리했다. 지킬 생각도 없이 쓸 수 있으니까. 돌아가는 길, 나는 사당 입구에서 잠깐 멈춰 섰다. 숲 저편, 나무 사이로 희미한 등불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사람의 것이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등불은 가만히 멈춰 있다가 잠시 흔들리다가, 이내 방향을 바꿔 멀어졌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조심스럽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애초에 발소리를 죽이는 데 능숙한 사람이라는 뜻이거나. 누구였을까. 서가 사람은 아니었다. 서가 사람이라면 저렇게 조심스럽게 움직일 이유가 없으니까. 종을 부리는 하인이라면 저 시간에 산속을 돌아다닐 이유가 없고, 손님이라면 애초에 저 방향으로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럼 남는 건 하나뿐이었다. 서가와는 아무 상관 없는 누군가가, 아무도 모르게, 이 산을 드나들고 있다는 것. 라온이 아까 그렇게 오래 숲 쪽을 바라본 게 이것 때문이었을까. 나는 뒤늦게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걸 느끼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발걸음을 서두를수록 숨이 가빠졌고, 등불의 잔상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이불 속에 몸을 눕히고도 나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그 등불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그리고 라온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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