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연회가 있고 나서 며칠, 나는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사당을 오갔다.
발소리를 죽이는 법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하녀들이 잠든 시간을 골라 뒷문으로 빠져나가고, 달빛이 없는 밤을 골라 걸음을 옮기고. 스스로 생각해도 참 대단한 밀행이다 싶었다.
원래 이런 인생을 살 생각은 없었는데.
연회에서의 그 시선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헌 왕자가 나를 보던 그 눈빛. 뭔가 캐내려는 듯한,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 태도가 자꾸 떠올라서 잠도 설쳤다. 산에 대해 물어봤을 때 내가 너무 티가 났나. 아니, 티가 안 났을 리가 없지. 손끝이 떨리는 걸 나도 느꼈으니까.
그래도 어쩌겠어. 라온을 지켜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은 자꾸 빨라졌다. 사당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멀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 · ·
서가의 둘째 영애를 처음 눈여겨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연회에서 그녀가 보인 태도는 예상 밖이었다. 지루하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귀족 영애는 드물었다. 대부분은 거짓 웃음을 짓고 아부를 하거나, 아니면 아예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는 게 보통이었다. 그녀는 둘 다 아니었다. 오히려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엔 그저 별종이라 생각했다. 성격이 특이한 영애 정도로만 넘겼을 것이다.
야산에 대한 질문에 대한 반응도 흥미로웠다. 놀란 기색을 완벽히 숨기려 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굳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미묘한 변화였는데, 이상하게도 계속 눈에 걸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산에 드나드는 걸까.
최근 그 숲 근처에서 이상한 힘의 흔적이 감지된다는 보고가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빛이 밤마다 산 어귀에서 흘러나온다는 목격담도 있었고, 왕실 소속 감시자들이 몇 차례 조사를 나갔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고 했다. 산세가 험해 접근이 어렵다는 보고만 반복될 뿐이었다.
나는 그 우연들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직감이 들었다.
귀족가의 영애가, 그것도 평소 얌전하기로 이름난 서가의 둘째가 밤마다 그 산 근처를 오간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알 수 없는 힘의 기운이 감지된다는 것. 이 둘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시기가 너무 딱 맞았다.
확인이 필요했다.
직접 눈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이나 보고서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 · ·
그날 밤, 사당으로 가는 길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낮은 목소리들. 사람의 것이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 시간에 이 근처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숨소리를 죽이려 했지만,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들킬까 봐 오히려 더 조급해졌다.
사당 앞에 남자 셋이 있었다. 왕실 복식을 입은 이들이었고, 그중 하나가 그물 같은 걸 들고 있었다. 사당 안쪽에서 낮게 울리는 신음 소리가 들렸다.
라온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저 그물이 무엇을 위한 건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이 근처에서 빛이 나왔다니까." 남자 중 하나가 말했다. "영수가 맞다면 상부에 큰 공을 세우는 거야."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다른 남자가 만류했다. "허가도 없이 이러다 문제 생기면 어쩌려고."
"이미 다쳤는데 뭐가 문제야. 그냥 잡아가면 되지."
다쳤다는 말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이 라온을 다치게 한 건가. 아니면 이미 다친 라온을 이용하려는 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지금 저 안에서 라온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뛰쳐나갔다.
"거기 뭐 하는 거예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나도 놀랄 정도로.
세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영애가 왜 여기…"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사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라온이 옆구리에 상처를 입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은빛 털 사이로 붉은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상처를 본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라온."
"바보같이…… 왜 나온 거야." 라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나는 손을 뻗어 상처 위에 얹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손이 떨렸다. 라온이 가르쳐준 대로, 호흡을 맞추고 온기를 끌어올렸다.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큰 힘이 필요했다. 손바닥이 뜨거워지면서 팔 전체가 저릿해졌다.
이렇게 큰 상처는 처음이었다. 내가 정말 이걸 치료할 수 있을까.
"영애, 지금 뭘 하는 겁니까." 뒤따라온 남자가 소리쳤다. "그 존재는 왕실 소유입니다. 함부로 손대면 안 됩니다!"
왕실 소유라는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살아 있는 존재를 소유물이라 부르는 게 말이 되나.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 사람이 왕실 소속이라는 게 더 어이없었다.
"소유물이면 다쳐도 상관없다는 뜻인가요?" 나는 라온의 상처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되물었다.
남자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듯했다.
"이건 규율 위반입니다." 다른 남자가 그물을 다시 집어 들며 다가왔다.
나는 그들을 막아서는 자세로 라온 앞에 섰다. 겁이 났지만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규율이 뭔지는 몰라도, 다친 걸 방치하는 게 규율이면 그건 틀린 규율이에요."
말은 당당하게 나왔지만 속으로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세 명, 그것도 왕실 소속인 남자들을 나 혼자서 막아설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여기서 물러나면 라온은 저 그물에 씌워질 거다. 그 생각만으로도 물러날 수가 없었다.
손바닥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라온의 상처를 덮었다.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가는 걸 느끼며, 나는 그들을 똑바로 마주 봤다. 남자들의 표정이 당혹감에서 서서히 경계심으로 바뀌는 게 보였다.
빛이라니. 저들이 찾던 게 바로 이 빛이었을까.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드러내 버린 건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