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연회장을 가득 채우던 현악의 선율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 변화는 아주 미묘했지만, 홀 안에 있는 모든 이가 동시에 알아챌 만큼 뚜렷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홀 중앙의 계단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그 흐름은 마치 물결이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우면서도 거역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지안은 그 분위기의 변화를 온몸의 피부로 느끼며 은서의 곁에 좀 더 가까이 붙어 섰다. 사람들의 눈길이 자신에게서 완전히 떠났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마땅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지안은 부인할 수 없었다. 은서 역시 그 순간만큼은 평소의 여유를 잃은 듯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는데, 그것은 지안이 지금까지 봐온 은서의 어떤 모습과도 달랐다.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곧게 펴져 있던 은서의 어깨가, 아주 조금이지만 안으로 움츠러들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지안을 둘러싸고 수군거리던 영애들도, 은서의 단호한 대답에 슬그머니 물러나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던 참이었다. 그들의 부채질 소리와 낮은 웃음소리가 아직 지안의 귓가에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계단 쪽으로 쏠린 관심 속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짧은 승리의 순간, 지안은 오랜만에 자신이 이 자리에 존재해도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느낌은 낯설고도 따뜻했다. 마치 오래 잊고 있던 온기를 다시 손에 쥔 기분이었다.
"방금 그건 고마워." 지안이 조용히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그 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편들어줄 필요는 없었는데."
"필요가 있었어." 은서가 앞을 바라본 채로 대답했다. 그 시선은 여전히 계단 쪽을 향해 있었는데, 마치 무언가가 다가올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네가 무시당하는 걸 보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지안은 그 말에 잠시 은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촛불과 샹들리에의 빛이 섞여 은서의 얼굴에 옅은 금빛을 드리우고 있었는데, 그 빛은 은서의 창백한 뺨 위로 흐르며 평소보다 더 또렷한 윤곽을 그려냈다. 그 표정 속에는 지안이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어떤 절박함이 서려 있는 듯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지안은 아직 명확히 짚어내지 못했지만, 그 감정이 단순한 우정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 느낌은 마치 손끝에 닿을 듯 말 듯한 실크의 결처럼, 잡으려 하면 이내 흩어지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굳어 있는 걸까.*
지안은 속으로 물었지만, 그 답을 얻을 새도 없이 홀 안의 시종이 큰 소리로 무언가를 고했다. 그 목소리는 낭랑하면서도 절도가 있어, 순식간에 연회장 전체의 이목을 끌어들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계단 위로 향했고, 지안도 무심코 그쪽을 바라보았다.
계단 위에서 걸어 내려오는 것은 한 청년이었다. 짙은 남색 예복을 입은 그는 걸음걸이부터 예사롭지 않은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오래 훈련된 무용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뒤로 몇몇 시종이 조심스레 따르는 모습이 그의 신분을 짐작케 했고, 그들의 발소리조차 청년의 걸음에 맞춰 절제되어 있는 듯했다. 연회장 안의 소음이 순식간에 잦아들며, 모든 시선이 그 청년에게로 쏠렸다. 마치 홀 전체가 하나의 숨을 들이켠 채 그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지안은 옆에 선 은서의 몸이 미세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떨림이었지만, 은서의 소매에 닿아 있던 지안의 손끝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평소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은서의 얼굴에, 처음으로 뚜렷한 동요가 스치고 있었다. 그 동요는 은서의 눈가에서 시작되어 턱선까지 서서히 번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은서야." 지안이 낮게 불렀다.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조심스러움이 섞여 나왔다. "저 사람 누구야?"
은서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계단을 내려오는 청년에게 고정되어 있었는데, 그 눈빛에는 반가움도 아니고 적의도 아닌, 어딘가 복잡하게 얽힌 감정이 서려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온 무대에 마침내 오르게 된 배우의 얼굴 같기도 했고, 피할 수 없는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의 얼굴 같기도 했다.
"차기 후계자." 은서가 마침내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무거웠으며, 한 음절씩 끊어내는 듯한 절제가 배어 있었다. "성문 공작가의 적통, 이휘겸이야."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지안은 주변 사람들의 속삭임이 다시 파도처럼 번지는 것을 느꼈다. 부채 뒤로 가려진 입술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낮은 목소리들이 서로 겹쳐지고 흩어졌다.
"저분이 바로 그... 하 백작가와 혼담이 오간다던 그 도련님 아니야?"
"드디어 얼굴을 보이시네. 두 분이 오늘 처음 정식으로 만나는 자리라던데."
"소문만큼 미남이시래. 그런데 성격이 만만치 않다는 얘기도 있고."
지안의 심장이 이상하게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은서를 돌아보았고, 은서의 표정에서 조금 전까지의 단호함이 다른 무언가로 서서히 대체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두려움도 아니고 기대도 아닌, 오래 묵혀둔 어떤 각오와 비슷한 것이었다.
계단을 내려온 청년, 이휘겸은 곧장 홀을 가로질러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걸음은 느긋했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이 자리의 중심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의 여유가 담겨 있었다. 사람들이 좌우로 물러서며 길을 내는 모습이, 마치 그 앞에서는 모두가 자연스럽게 몸을 낮추는 듯 보였다. 그의 시선이 스치는 곳마다 사람들의 등이 살짝 굽어지는 것을, 지안은 신기하다는 생각으로 바라보았다.
지안은 그 순간 자신의 손이 저도 모르게 은서의 소매 끝을 살짝 붙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스스로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무언가가 그녀의 손을 그렇게 움직이게 만들었다. 마치 이 걸음이 다가올수록, 은서가 자신에게서 멀어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휘겸의 시선이 홀 안을 훑다가, 이내 은서에게 고정되었다. 그 시선은 잠깐이었지만 지안에게는 그 짧은 순간이 아주 길게 늘어진 듯 느껴졌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는데, 그것은 반가움보다는 오래전부터 정해진 절차를 이행하는 듯한 냉정한 여유가 배어 있는 미소였다. 그 미소 안에는 어떤 온기도 담겨 있지 않았고, 다만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사람의 능숙함만이 서려 있었다.
"하은서 양." 그가 낮고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뵙게 되었군요."
그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거스를 수 없는 위압감이 은근하게 깔려 있었다. 연회장 안의 모든 시선이 두 사람 사이로 모여들었고, 지안은 그 시선들 한가운데서 자신이 갑자기 투명해진 듯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조금 전까지 자신을 감싸고 있던 존재감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지켜주던 은서의 단호함이,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자신이 감히 끼어들 수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지안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은서는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지안의 소매에서 자신의 옷자락을 빼내며 이휘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동작은 조심스러웠지만 분명한 의도를 담고 있었고, 지안의 손끝에서 옷감의 마지막 감촉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순간, 지안은 이상하게도 그것이 아주 멀고 낯선 거리감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방금까지 같은 편이었던 사람이, 한 걸음의 방향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세계로 건너가버린 것처럼.
은서의 고개가 이휘겸을 향해 살짝 기울어졌고, 그 입술이 무언가 대답을 준비하려는 듯 열리려는 참이었다. 지안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 사이로 흐르는 팽팽한 침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