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가 빛나던 여름

2화

여름방학 첫날, 강민준은 새벽 여섯 시에 눈을 떴다. 창밖은 아직 옅은 회색이었다. 그는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조용했다.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될 만큼 새벽 공기는 서늘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아둔 수첩을 펼쳤다. 어젯밤 늦게까지 정리한 계획표였다. 아침 조깅 삼십 분. 식단 조절. 저녁 스트레칭.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는 페이지를 넘기며 손끝으로 글자를 하나씩 짚어 내렸다. 그저 꾸준함이 전부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확신이라기보다는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그는 수첩을 덮고 운동화를 신었다. 약속 장소는 동네 하천 산책로였다. 그는 오 분 먼저 도착해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하천 위로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물소리가 조용히 흘렀다. 강민준은 팔짱을 낀 채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여섯 시 이십오 분. 저 멀리서 걸어오는 서은채가 보였다. 반팔 티셔츠에 헐렁한 바지, 어색하게 흔들리는 걸음걸이. 머리는 대충 묶어 올렸고, 얼굴엔 아직 잠이 덜 깬 기색이 남아 있었다. — 늦었어. 강민준이 짧게 말했다. 서은채는 숨을 몰아쉬며 손목시계를 힐끗 봤다. — 삼 분밖에 안 늦었잖아. — 삼 분도 늦은 거야.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강민준은 벤치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팔을 뻗고, 다리를 굽히고, 목을 좌우로 돌렸다. 서은채는 그 동작을 어설프게 따라 했다. — 이렇게? — 무릎 펴지 말고. — 이렇게? — 그거 아니고. 결국 강민준이 다가와 그녀의 무릎 각도를 손으로 살짝 눌러 조정했다. 서은채는 순간 움찔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이 닿았던 자리가 잠깐 뜨거웠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걷는 속도였다. 강민준이 페이스를 조절하며 옆에서 걸었다. 산책로를 따라 늘어선 벚나무는 이미 잎이 무성했고, 그 아래로 아침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몇몇 지나쳐 갔다. — 힘들면 말해. — 안 힘들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서은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하아, 하아. 이마에 땀이 배어 나왔다. 티셔츠 등판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강민준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대신 옆에서 걸음을 맞추며 조용히 말했다. —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제일 위험한 거야. 딱 그 순간만 넘기면 돼. 서은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를 악물고 발을 옮겼다. '왜 저렇게 확신 있게 말하는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하나도 확신이 없는데.' 발바닥이 뜨겁게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추면 그가 뒤돌아볼 것 같았다. 그 시선이 싫어서 그녀는 계속 걸었다. 첫 주는 지루하게 흘러갔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산책로. 같은 벤치에서 시작해서 같은 다리 밑에서 방향을 돌리는 코스였다. 서은채는 처음엔 삼십 분을 걷는 것도 힘들어했지만, 나흘째부터는 걸음의 리듬이 조금씩 몸에 붙었다. 식단은 도시락 반찬을 절반으로 줄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강민준은 매일 저녁 문자를 보냈다. [오늘 저녁 뭐 먹었어?] 서은채는 사진을 찍어 보내곤 했다. 닭가슴살, 삶은 계란, 오이. 어느 날은 실수로 라면 냄비 사진을 잘못 보냈다가 황급히 지우고 다시 보내기도 했다. 강민준의 답장은 늘 짧았다. [잘했어.] 그 두 글자가 며칠간 서은채의 하루를 버티게 해줬다. 그녀는 그 문자를 캡처해서 사진첩 한구석에 모아두기도 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지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체중계 숫자는 겨우 팔백 그램 줄어 있었다. 서은채는 방바닥에 앉아 체중계를 노려봤다.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다시 발을 올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힘든데 겨우 이거야.'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산책로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 나 못 할 것 같아. 강민준이 몇 걸음 앞서가다 뒤돌아봤다.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 왜. — 힘들어서. 그리고... 별로 안 변하는 것 같아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서은채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운동화 끝에 흙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만 계속 내려다봤다. 강민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 따라와. 서은채는 얼떨결에 따라 걸었다.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강민준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페이스를 조금 늦추며 나란히 걸었다. 하천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물결이 잠깐 흐트러졌다가 다시 잔잔해졌다. — 한 달 만에 바뀌는 사람은 없어. 원래 그런 거야. — ... — 근데 넌 지금 삼 주째 매일 나왔잖아. 그거 아무나 못 해. 서은채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이 왜인지 가슴 어딘가를 건드렸다. '아무나 못 한다니.' 그녀는 속으로 그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대단한 칭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문장이 계속 귀에 남았다. — 숫자만 보지 마. 강민준이 덧붙였다. — 처음보다 오래 걷잖아. 처음보다 덜 헐떡거리고. 그게 변한 거야. 서은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옆에서 걷는 그의 옆얼굴을 슬쩍 쳐다봤다.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말투에는 어딘가 다른 온도가 섞여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힘들었지만, 예전처럼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체중계 숫자를 확인하는 대신, 하루하루 걸은 거리를 수첩에 적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견딜 만해졌다. 그리고 그 무렵,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근처 아파트 단지 앞 편의점 테라스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한도영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든 채 무심히 앉아 있다가 두 사람이 지나가는 걸 발견했다. 처음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두 사람을 다시 마주쳤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강민준의 걸음걸이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서은채는 그 옆에서 몇 번이고 뒤처졌다가 다시 따라붙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거의 없었지만, 어딘가 리듬이 맞아떨어지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 저 둘이 왜 저러고 다녀? 혼잣말이었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손등을 타고 흘렀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입가엔 어딘가 흥미로운 표정이 걸려 있었다. 마치 재미있는 걸 발견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한도영은 스마트폰을 꺼내 두 사람이 걸어가는 방향을 카메라로 슬쩍 찍었다. 화면 속에서 강민준과 서은채는 점점 작아지며 다리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한 번 더 확인하고, 화면을 끈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거 재밌어지겠는데. 그의 목소리엔 장난기와 동시에 어떤 계산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한도영은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자리에서 그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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