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칠월 하순, 하천 산책로의 나무들은 짙은 초록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치며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강물 위로 저녁 햇살이 부서졌다. 서은채는 그 빛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이제 삼십 분을 뛸 수 있게 됐다.
처음엔 오 분도 채 못 뛰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옆구리가 찢어질 듯 아팠고, 다리는 물을 잔뜩 먹은 솜뭉치 같았다. 그때마다 강민준은 걸음을 늦추며 그녀의 페이스에 맞춰줬다. 말없이. 그냥 옆에 있어줬다.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뛰면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 오늘은 얼마나 줄었어?
강민준이 물었다. 그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은근한 관심이 배어 있었다. 서은채는 뛰던 걸음을 잠깐 멈추고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내밀었다.
— 삼 킬로.
그는 화면을 잠깐 들여다봤다.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 잘하고 있어.
짧은 말이었다. 딱 네 글자.
하지만 서은채의 얼굴엔 옅은 웃음이 번졌다. 그녀는 그 웃음을 감추려 얼른 고개를 돌렸다. 강물을 보는 척했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방금 뛰어서 그런 걸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식단도 익숙해졌다. 처음엔 억지로 삼키던 닭가슴살도 이제는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소스를 어떻게 뿌리느냐에 따라 맛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도 알게 됐다. 강민준은 매주 새로운 레시피를 찾아 메시지로 보냈다.
[이번 주는 이거 한번 해봐. 파프리카랑 같이 볶으면 덜 퍽퍽해.]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서은채는 그게 얼마나 큰 배려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다이어트를 한 적도 없으면서, 인터넷을 뒤지고 영상을 찾아보며 그녀에게 맞는 것들을 골라냈다. 그 시간을 상상하면 가슴 한쪽이 뭉근하게 저려왔다.
하지만 팔월로 넘어가면서 정체기가 찾아왔다.
몸무게가 일주일째 그대로였다. 매일 아침 체중계 위에 올라설 때마다 숫자는 어제와 똑같았다. 소수점 하나까지 미동이 없었다. 서은채는 그 숫자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산책로 벤치에 앉아 물병을 만지작거리던 서은채가 입을 열었다.
— 이번 주는 그대로야.
— 그럴 때도 있어.
— 근데 자꾸 이런 식이면... 학기 시작할 때까지 얼마 못 바뀔 것 같아.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손끝이 물병 뚜껑을 만지작거리다 멈췄다. 눈가가 붉어졌다. 참으려 했지만 결국 눈물이 뚝 떨어졌다. 벤치의 나무 판자 위로 작은 물방울이 스며들었다.
— 나 그냥...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나을까.
목소리가 떨렸다. 어깨도 조금씩 떨렸다. 그동안의 노력이 전부 헛수고였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매일 아침 알람보다 먼저 일어나 뛰러 나왔던 날들, 좋아하던 음식들을 참았던 순간들, 전부 다.
강민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짧게 잡았다. 손바닥이 어깨뼈에 닿는 순간, 서은채는 숨을 삼켰다.
— 정체기는 몸이 변하는 중이라는 신호야. 멈춘 게 아니라.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의 손끝에는 어떤 힘이 실려 있었다. 흔들리지 말라는, 조용한 확신 같은 것.
서은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그의 손끝이 어깨에 남긴 온기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가 손을 뗀 뒤에도 그 자리가 뜨거운 것 같았다.
— 진짜야?
— 진짜야.
강민준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마주 봤다. 그 눈빛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작게 웃었다.
'왜 저 말 한마디에 다시 힘이 나는 걸까.'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얘한테만 이런 기분이 드는 게, 대체 무슨 감정인 걸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었다. 서은채는 그 질문을 삼키고, 대신 물병 뚜껑을 열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물이 이상하게 차가웠다.
정체기는 며칠 뒤 풀렸다.
체중계 숫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오백 그램, 그다음엔 일 킬로.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서은채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강민준에게 보냈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답장은 짧았지만 그녀는 그 짧음 속에서도 온기를 느꼈다.
그때부터는 눈에 띄게 변화가 빨라졌다. 얼굴선이 갸름해지고, 옷이 헐렁해지기 시작했다. 예전엔 허벅지에 꽉 끼던 바지가 이제는 허리춤을 잡아 올려야 할 정도로 헐렁해졌다. 서은채는 매일 아침 거울 앞에 서서 조금씩 달라지는 자신을 확인했다.
팔월 말, 방학이 끝나갈 무렵. 서은채는 오랜만에 옷장 깊숙이 넣어뒀던 원피스를 꺼내 입어봤다. 작년 봄, 살 때는 예뻐서 샀지만 몇 번 입지도 못하고 넣어뒀던 옷이었다. 그때는 허리 지퍼가 반도 올라가지 않았다.
지퍼가 스르륵 올라갔다. 끝까지.
거울 속에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어깨선이 드러났고, 허리는 잘록했다. 서은채는 한참을 그 앞에 서서 자신을 들여다봤다. 손으로 옆구리를 만져봤다. 예전에는 없던 곡선이 손끝에 걸렸다.
'이게 나야?'
믿기지 않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거울을 피해 다니던 자신이, 이제는 거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날 산책로에서 강민준은 처음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시선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 많이 변했다.
서은채의 얼굴이 붉어졌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 그, 그런 말은 좀 갑자기 하지 마.
— 사실이잖아.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순간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는 걸, 그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서은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강물 소리만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서은채는 그 정적이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개학 전날 밤, 서은채는 거울 앞에서 오래도록 자신을 바라봤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싫지 않았다. 눈매는 그대로였지만 얼굴선이 달라져 있었다. 턱 아래로 지지 않던 살이 이제는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보냈다.
[내일 진짜 다르게 보일까? 갑자기 무서워.]
보내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다. 이런 걸 왜 물어보는 걸까, 애처럼. 하지만 이미 보낸 문자를 취소할 수는 없었다.
답장은 금세 왔다.
[걱정하지 마. 넌 잘 해왔어.]
서은채는 그 짧은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짧은 문장 안에 담긴 무게가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창밖으로는 여름 끝의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매미 소리가 아직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여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리듯.
서은채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지난 몇 달이 스쳐 지나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던 첫날, 억지로 삼켰던 닭가슴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벤치, 그리고 어깨에 남았던 온기.
내일이 오면, 모든 게 바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생각을 안고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창밖의 바람이 커튼을 살짝 흔들었다. 방 안은 조용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남아 있었다. 내일, 학교에서 마주칠 얼굴들을 상상하면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리고 그 감정들 사이 어딘가에는, 늘 그렇듯 강민준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