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성녀님, 제가 지키겠습니다

3화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죽인 채 소리가 난 방향을 살폈다. 저벅저벅, 확실히 사람 발소리였고, 게다가 갑옷 부딪치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쇠와 쇠가 스치는 그 특유의 마찰음은, 이 세계에서 살아온 지 오래인 지금도 몸이 먼저 알아채고 얼어붙게 만드는 소리였다. 신전 기사가 이 근처를 순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지금 여기서 백서연과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면, 나는 성녀 도피 조력자로 낙인찍힐 게 뻔했다. 낙인이라니. 이 세계에서 그 단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이마에 도장을 찍는 수준의 형벌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그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라고 정리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백서연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고, 그녀는 고통에 흡, 하는 숨소리를 내면서도 순순히 몸을 맡겼다. 저항할 힘조차 없다는 게 그대로 느껴져서 오히려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손끝에 닿는 팔뚝이 놀랄 만큼 가늘었는데, 게임 속 화려한 일러스트로만 보던 성녀가 이렇게 부서질 것 같은 무게로 내 어깨에 실려 온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실감이 안 나서 더 무서웠다. 다행히 발소리는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멀어졌다. 나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면서도, 이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황이 앞으로 계속될 거라는 걸 직감했다. 직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이런 확신은 대체로 틀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집으로 데려가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조모가 계셨고, 옆집 부부는 우리 집 담벼락에 코를 박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마당에서 기침 소리만 나도 다음 날 아침 장터에 소문이 도는 동네였다. 그렇다고 마을 여관에 재울 수도 없었다. 성녀의 실종은 이미 마을 아이들 입방아에까지 오를 정도로 소문이 났을 텐데, 그 얼굴을 여관 주인이 알아보지 못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초상화 한 장만 돌았어도 끝장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곳이 마을 외곽에 있는 우리 집 소유의 낡은 약초 창고였다. 원래는 조부가 채집해 온 약재를 임시로 보관하던 곳인데, 근래에는 거의 쓰지 않아서 방치되어 있었다. 문짝은 삐걱거렸고 안쪽은 마른 풀 냄새와 흙냄새가 섞여 있었지만, 적어도 사람이 드나드는 곳은 아니었다. 나는 백서연을 그곳에 눕히고, 급한 대로 상처에 바를 연고와 지혈용 약초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어두운 창고 안에서 그녀의 눈이 희미하게 빛나는 걸 보고 있자니, 이게 소설 속 클리셰라면 지금쯤 배경 음악이 깔려야 할 장면인데, 실제로는 곰삭은 나무 냄새와 벌레 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좀 쉬세요. 아무한테도 안 들키게 조심할 테니까."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 계획이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싶어서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사흘? 이레? 아니면 오늘 밤을 넘기지도 못할까. 백서연은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가, 다시 무언가에 짓눌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표정이 묘하게 낯익었는데, 곧 알았다. 포기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저는 곧 발견되면 어차피..." "발견되면 어차피, 뭐요." "처형당할 거예요. 이단 재판을 피해 도망친 거니까." 나는 그 말을 듣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단 재판이라니. 게임에서 알던 흐름보다도 몇 단계는 더 나아간 상황이었다. 원작에서는 성녀가 신전을 이탈하는 사건이 있긴 했지만, 그건 훨씬 나중이었고 재판까지 열리는 전개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이미 재판까지 열렸고, 그 결과가 처형이었으며, 그녀는 그걸 피해 도망친 상태였다는 뜻이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이렇게까지 완전히 무너져 있을 줄은 몰랐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쉬시고, 내일 다시 이야기합시다." 그렇게 그녀를 창고에 두고 나오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이건 명백히 계획 위반이었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아가겠다는 목표가 오늘로 완전히 깨진 셈이었다. 그런데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못 본 척했다면, 나는 아마 평생 이 순간을 후회하며 살았을 것이다. 후회는 늦게 오는 법이니까. 다음 날 새벽, 나는 창고에 몰래 죽 한 그릇을 가지고 갔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창고 문 앞에 마을 이장 어른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벽 공기 속에서 김이 오르는 죽 그릇을 든 채, 나는 순간적으로 그릇을 등 뒤로 숨길지 그냥 들고 있을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도윤이 이 시간에 창고에는 뭔 볼일이여." 심장이 그대로 발밑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게 절망이라는 감정인가 보다, 라고 자각할 여유도 없이 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약초가 상했나 봐서요. 확인하러 왔습니다." "그러냐. 그런데 안에서 뭔 소리가 났었는데." 이장의 눈빛이 의심스럽게 좁아졌다. 그 순간 창고 안에서 낮은 기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씨발. 나는 속으로 욕을 삼키면서도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는데, 이게 바로 두려움과 허세가 동시에 드러나는 순간이라는 걸 나조차도 실감했다. 표정 관리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먼 친척 되는 누이가 몸이 안 좋아서 잠깐 요양하러 왔습니다. 소란스럽게 안 하려고 조용히 부탁드렸는데." 즉석에서 지어낸 말이었지만, 이장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일단은 넘어가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장 뒤편, 마을로 통하는 길목에서 갑옷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숲에서 마주쳤던 그 기사였다. 갑주 사이로 새벽빛이 반사되는 걸 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근처에서 도망친 죄인의 흔적을 찾고 있소. 혹시 못 보셨소?" 기사가 이장에게 물으며 다가오는데, 나는 창고 문 앞에 몸을 반쯤 겹쳐 세우며 최대한 태연하게 대응했다. 손에 든 죽 그릇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저희는 못 봤습니다. 이 창고는 그냥 약재 보관소일 뿐이라서요." 기사의 시선이 창고 문에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나를 훑었다. 그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훑고 지나가는 그 몇 초가 마치 몇 분처럼 늘어졌다. 순간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는데, 이대로 검문을 당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문 하나만 열어도, 아니 저 죽 그릇 두 개가 아니라 하나만 더 있어도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흠. 알겠소. 혹시 발견하면 신전에 즉시 알리시오." 다행히 기사는 순찰 방향을 바꾸며 멀어져 갔다. 그 순간 나는 다리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창고 벽에 기대야 했다. 이런 게 안도라는 감정인가 보다 싶었지만,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장이 여전히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윤아, 니 지금 뭔 사고를 친 겨. 표정이 그런데 아니라고 하면 내가 믿어야 쓰겄냐." 이장의 눈은 반평생을 이 마을에서 사람 얼굴만 보고 산 사람의 눈이었다. 거짓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그 순간 다시 한번 절감했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사실을 조금 각색해서 털어놓았다. 정체까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다치고 쫓기는 사람을 하룻밤 재웠다는 것 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장은 팔짱을 끼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창고 문을 한 번, 나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그럼 니가 책임지고 데리고 있어. 대신 마을에 소란은 절대 안 되는 겨. 그거 하나 못 지키면 나도 신전에 알릴 수밖에 없다." 원치 않게 떠맡게 된 셈이었다. 백서연을 정식으로, 그것도 마을 이장의 눈을 피해가며 돌봐야 하는 임무가 순식간에 내 몫이 되어 버린 것이다. 조용히 살겠다는 다짐이 사흘도 못 가서 이렇게 무너지는 걸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창고 문을 다시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 안쪽에서 작게 흘러나오는 기침 소리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저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이 세계의 성녀라는 게,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그날 오후, 신전에서 정식으로 사람을 파견했다는 소식이 마을에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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