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조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순간적으로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안도는 오랜만에 조부를 만난다는 반가움에서였고, 불안은 창고에 백서연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조부가 눈치챌 수도 있다는 걱정에서였다. 이런 게 복잡한 감정이라는 건가 보다, 하고 굳이 정리할 필요도 없이 이미 심장이 두 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뛰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반갑다고 팔딱거리고 다른 쪽에서는 들킬까 봐 쪼그라드는, 이 두 심장이 같은 몸속에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조부는 등에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채로 마당에 들어섰는데, 몇 달 사이 흰머리가 조금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여행길이 고생스러웠는지 신발도 흙투성이였고, 지팡이 대신 짚고 온 나무 막대기는 끝이 다 닳아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대뜸 소리부터 지르셨다.
"이 자슥아,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 밥은 챙겨 먹고 다니는 겨."
"잘 지냈습니다, 할아버지."
"인사는 됐고, 짐이나 좀 받아라. 무거워 죽겄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게 짐을 던지듯 넘기셨지만, 내 얼굴을 흘긋 살피는 그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배낭을 받아 드는데 무게가 상당해서 나도 모르게 어깨가 휘청였다. 이 안에 대체 뭐가 들었길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게 바로 츤데레라는 걸까, 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낼 만한 말은 아니었다. 말했다가는 또 뭐라고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조부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번 채집 여정에서 구한 귀한 약초들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는데, 그중 하나가 특히 눈에 들어왔다. 밥그릇을 앞에 두고도 젓가락질보다 말이 더 많으신 걸 보니, 이번 여정에서 뭔가 자랑할 만한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번에 산 깊은 곳에서 은한초를 좀 캤다. 이게 상처 회복에는 최고인데, 시중에는 거의 없는 물건이여. 뿌리 하나 캐는 데 반나절은 족히 걸렸다니까."
은한초라니. 나는 순간 눈이 커졌다. 백서연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딱 필요한 약초였다. 이런 우연이 있나, 싶었지만 어쩌면 이건 우연이 아니라 그냥 조부가 원래 그런 걸 잘 구해오는 사람이라서 그럴 수도 있었다. 세상이 나를 도와주는 건지 아니면 그냥 조부 실력이 좋은 건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은 감사할 일이었다.
"할아버지, 그거 조금만 나눠주실 수 있으실까요."
"뭔데, 어디 다친 사람 있냐."
조부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방금까지 신나게 자랑하던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심문관처럼 바뀌는 걸 보고, 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결국 어느 정도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어차피 조부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오래 숨길 수도 없을 것 같았고,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데 대충 둘러댔다가는 더 큰 사달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사실은... 창고에 사람을 숨겨두고 있습니다. 다친 여자분인데, 신전에서 쫓고 있는 사람입니다."
식탁에 정적이 흘렀다. 조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한참을 나를 바라보셨는데, 그 시선이 어찌나 무겁던지 하늘이 노래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게 후회라는 감정인가 보다, 하고 자각하는 순간 조부가 입을 열었다.
"신전에서 쫓는다고? 그게 뭔 말이여, 이단자를 숨겼다는 겨?"
"자세히는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억울한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억울하고 아니고를 니가 어떻게 판단해. 이 자슥아,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기는 하는 겨?"
조부의 목소리가 커졌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눈을 마주쳤다. 이상하게도 이 순간만큼은 두려움보다 뭔가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그 두근거림이 도망치라는 신호가 아니라 버티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압니다. 그래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조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결국 낮게 한숨을 내쉬셨다. 그 한숨이 어찌나 길던지, 방 안의 공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니 애비도 젊을 때 그런 오지랖 부리다가 집안 망한 겨. 알고나 하는 겨?"
그 말에 나는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우리 집안이 몰락한 이유 중 하나가 아버지의 그런 성정 때문이었다는 걸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늘 어렴풋한 이야기만 들었을 뿐, 이렇게 구체적인 사연은 처음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조부는 잠시 더 뭔가를 생각하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일단 그 은한초 가져가라. 그리고 저 뒷마당 지하에, 니 애비도 모르는 창고가 하나 있다. 거기다가 옮겨. 창고보다는 거기가 안전하니께."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반대할 줄 알았던 조부가 오히려 숨겨진 자원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반전인가, 방금까지 집안 망했다고 호통치던 사람이 갑자기 비밀 창고를 알려주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조부의 얼굴에는 이미 결심 같은 게 서려 있었다.
"할아버지, 반대 안 하십니까?"
"반대해서 니가 들을 거였으면 나한테 말도 안 했겠지."
조부는 그렇게 툭 던지듯 말하시면서도, 뒷마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조금 더 서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걸음걸이만 보면 마치 자기 일처럼 급한 사람 같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는데, 이런 걸 감동이라고 부르나 싶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괜히 말했다가 또 뭔 소리를 들을지 몰랐으니까.
지하 창고는 예전에 조부가 위급 상황을 대비해 만들어둔 은신처였는데, 통풍이 잘 되고 습기도 없어서 사람이 지내기에 훨씬 나은 환경이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 나왔고, 한쪽 구석에는 낡은 담요와 물통 같은 것들이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얼마나 오래전에 만들어둔 곳인지는 몰라도, 조부가 이런 걸 준비해둘 만큼 신중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나는 그날 밤 백서연을 그곳으로 옮겼고, 은한초를 우려낸 물로 상처를 씻어냈다. 그녀는 여전히 말이 많지 않았지만, 조금씩 눈빛에 힘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처음 데려왔을 때의 그 흐릿한 눈빛과는 확실히 다른, 사람 같은 눈빛이었다.
"이렇게까지...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을 때, 나는 딱히 대단한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다.
"글쎠요. 그냥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걸 못 보는 성격이라서요."
대충 그렇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사실 이보다 훨씬 복잡한 이유가 있다는 걸 나만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미소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옅었지만, 그동안 봐온 표정 중에는 가장 밝은 것이었다. 나는 그 미소를 보고 나서야, 이 위험한 일을 벌인 게 아주 헛짓은 아니었다는 확신이 조금 들었다.
그런데 그날 늦은 밤, 지하 창고 입구를 확인하러 나갔던 조부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평소 같으면 벌써 코를 골며 자고 있을 시간인데, 문밖에 선 조부의 표정은 잠기운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도윤아, 잠깐 나와봐라. 마당 저쪽 담벼락 밖에, 누가 서 있었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마당으로 나갔다. 조부가 가리킨 방향, 담벼락 너머 어둠 속에 사람 형체 하나가 서 있었던 흔적이, 발자국 몇 개로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듯했지만, 그 발자국의 방향이 정확히 지하 창고를 향해 있었다는 사실이 심장을 더 옥죄어 왔다. 나는 손전등도 없이 무릎을 굽혀 발자국을 살펴보았는데, 흙에 눌린 깊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누구였을까요."
"모르겄다. 근데 이 근처 사람 발걸음은 아니었어. 걸음 폭이 이상하게 넓더라."
조부의 목소리에는 처음 보는 종류의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보름의 유예 기간이 생각보다 훨씬 짧을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감싸는 걸 느꼈다. 발자국의 주인이 신전 쪽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게 벌써 이 담벼락까지 다다랐다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보름이 아니라 며칠, 혹은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