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쪼르륵.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도장 안을 채웠다.
아침 수련이 끝난 뒤였다. 관원들은 벌써 다 돌아가고, 나만 남아 마룻바닥에 남은 발자국들을 닦아내고 있었다. 걸레를 밀 때마다 나무 냄새가 훅 올라왔다. 오래된 도장 특유의, 땀과 먼지와 기름 냄새가 뒤섞인 그 냄새.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잠깐 눈을 찡그렸다. 시월치고는 볕이 제법 따가웠다.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가겠구나, 생각한 게 화근이었다.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으면 안 되는지, 나는 벌써 몇 번을 겪고도 매번 까먹는다.
딸랑.
문에 매달아둔 종이 울렸다. 손님이 드문 시간이었다. 이 도장은 대로변에서 한 블록 떨어진 데다 간판도 크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나 소문 듣고 온 사람이 아니면 잘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검은 외투를 걸친 중년 남자였다. 한눈에 봐도 무인은 아니었다. 손끝이 곱고, 걸음걸이에 힘이 없었다. 서류를 다루는 사람 특유의 냄새가 났다. 딱 봐도 검보다는 펜을 오래 쥐고 산 손이었다.
나는 걸레를 든 채로 잠깐 그를 훑어봤다. 이 시간에, 이런 차림으로, 이런 골목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대부분 둘 중 하나다. 뭔가를 팔러 왔거나, 뭔가를 캐러 왔거나. 저 눈빛은 후자 쪽이었다.
"이하준 도장주님 맞으십니까."
"그런데요."
대답하면서도 나는 걸레를 든 채로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손님 대접할 기분도 아니었고, 저 눈빛이 좀 마음에 걸렸다. 뭔가를 캐러 온 눈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눈빛 하나로도 상대가 어느 계열 사람인지 대충 감이 왔을 텐데, 요즘은 그 감이 많이 무뎌졌다. 아니, 무뎌진 게 아니라 일부러 무디게 살아온 거겠지.
"청화 가문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순간 걸레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청화. 그 이름을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였더라. 계산해보니 정확히 팔 개월 전이었다. 내가 그 성을 나온 날. 정확히는, 도망친 날.
그날의 기억은 이상하게도 소리로 먼저 떠오른다. 대문이 닫히던 소리, 그리고 그 뒤로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던 정적. 나는 그 정적을 등지고 걸었다.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던 기억이 아직도 목덜미에 남아 있다.
"용건이 뭡니까."
최대한 무심하게 물었지만, 목소리가 살짝 갈라진 걸 느꼈다. 이런 게 티가 안 나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이런 데서 서투르다. 표정 관리는 그럭저럭 되는데 목소리는 항상 먼저 배신을 한다. 예전에 다현이가 나한테 그랬었다. 넌 얼굴은 참 잘 숨기는데 목소리는 완전 유리몸이라고. 그때는 그냥 웃어넘겼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확한 평가였다.
"별건 아닙니다. 그저 안부를 여쭈러 온 것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남자는 도장 안을 훑어보았다. 벽에 걸린 목검들, 낡은 마루, 구석에 쌓인 짚단 인형. 이 정도 규모의 도장을 운영하는 사람이 예전에 어떤 자리에 있었는지 가늠하는 눈치였다. 그 시선이 유독 벽에 걸린 낡은 검집 하나에서 멈췄다. 저건 알아볼 리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래 머물렀다.
"안부 확인은 다 됐죠? 이만 가보시죠."
"도장주님."
남자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주님께서 도장주님을 다시 찾고 계십니다."
쿵.
심장이 한 박자 크게 뛰었다. 다현이. 서다현이 나를 찾고 있다는 말인가.
머리가 잠깐 핑 돌았다. 팔 개월. 그 시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며 지냈다. 확신했다기보다는,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시켰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만.
"제가 필요할 일이 뭐가 있다고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다만 최근 가문 내부가 조금 뒤숭숭합니다. 설란국 쪽에서 사람이 왔다 갔다 하고, 당주님도 부쩍 예민해지셨고요."
설란국.
그 나라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는 걸레를 내려놓았다. 손이 미묘하게 떨렸다. 애써 숨겼지만, 이 사람은 이미 봤을 것 같았다.
설란국. 그 이름을 들으면 항상 명치 쪽이 먼저 반응한다. 이유는 나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그냥, 그 두 글자가 조합되는 순간부터 몸이 먼저 경계 태세에 들어간다. 오래된 트라우마 같은 거려니, 하고 넘기려 해도 매번 이 정도로 반응하는 걸 보면 그냥 트라우마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저랑은 상관없는 일 같은데요."
"그러시겠지요."
남자가 씩 웃었다. 묘하게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영업용 미소랑도 다르고, 비웃음이랑도 다른, 뭔가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웃음.
"하지만 상관없는 사람한테 굳이 이런 걸음을 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냥 그를 노려봤고, 그는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다. 딸랑, 종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도장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걸레는 바닥에 그대로 놓인 채였고, 물은 이제 다 끓어서 뚜껑을 들썩이고 있었다. 쪼르륵, 넘치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화 가문. 서다현. 설란국.
세 개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무엇 하나 반가운 조합이 아니었다. 특히 마지막 이름은, 왜인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예감을 몰고 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불을 끄러 갔다. 손잡이가 뜨거워서 손가락 끝이 살짝 데었다. 아, 하고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머릿속은 계속 딴 데를 헤매고 있었다.
나는 도장 문을 잠그고 뒷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낡은 벽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날이었다.
호위무사를 그만둔 지 팔 개월. 조용히 살고 싶어서 도망친 자리에, 뒤숭숭한 소식 하나가 발을 걸었다.
망했다.
그동안 쌓아온 이 소박한 평화가, 저 검은 외투 하나 때문에 흔들리는 게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도장 월세 걱정, 관원 숫자 걱정 하던 며칠 전의 나는 참 팔자 좋은 놈이었구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 벌써부터 이런 식이면, 이번 주는 또 얼마나 시끄러워지려나. 나는 뒷목을 문지르며 낡은 벽시계를 다시 쳐다봤다. 시침이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반나절도 안 지났는데, 벌써부터 이 모양이라니.
문득 다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 애가 나를 어떤 눈으로 봤는지. 그 눈빛을 떠올리자마자 명치가 다시 조여왔다. 팔 개월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이 정도 반응이 나오는 걸 보면, 나는 아직 제대로 도망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연락을 기다린다고 했다. 그 남자는 내가 결국 연락할 거라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문제는, 나도 그걸 부정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