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해뜨기 전, 왕녀의 신랑

2화

그날 밤, 나는 잠을 설쳤다. 정확히는 잠들려고 눈을 감으면 자꾸 다현의 얼굴이 떠올라서 눈을 다시 떴다는 게 맞는 말이겠다. 벌써 팔 개월이나 지난 일인데, 아직도 이렇게 선명하다는 게 나 자신도 좀 어이가 없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나한테는 전혀 안 맞는 처방이었다. 서다현. 청화 가문의 당주. 붉은 머리를 가진, 참주 같은 여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나이는 어린데 눈빛은 이미 한 나라의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단단했다. 그 나이에 그런 눈을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나는 그 밑에서 3년을 호위무사로 일했다. 웃긴 게, 나를 호위무사로 삼은 것도 다현 본인의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너, 검 좀 쓰네." 길거리에서 우연히 시비 붙은 놈들을 정리하는 걸 보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이력서도, 면접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내 호위 해라." "제가요?" "응. 지금부터." "저기, 저는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요." "청화 다현. 이제 알았지? 그럼 오늘부터 출근이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였다. 세상에 이런 채용 절차가 어디 있나 싶었지만, 다현은 늘 그런 식이었다. 멋대로 정하고 멋대로 밀어붙이더니, 결국 사람 마음까지 멋대로 흔들어놓았다. 처음 몇 달은 그저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그녀의 처소 앞을 지키고, 회의에 동행하고, 밤이면 순찰을 돌았다. 그녀는 나를 부하로도, 그림자로도 대했다. 가끔은 술친구처럼 굴기도 했다. 취기가 오르면 하는 말이라고는 죄다 가문 흉이었지만, 그것도 나름 정이 붙는 시간이었다. "너는 진짜 안 궁금해?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안 궁금합니다." "거짓말도 못 하는 놈이 눈은 왜 저렇게 궁금해하는 눈이야." 그런 식으로 서로를 알아갔다. 나는 그녀를 지키는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 3년 동안 단 한 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밤을 새우는 날도, 몸살이 나는 날도, 그녀 곁을 비운 적은 없었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진짜로 나를 필요로 했던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여덯 달 전이었다. 가문 내부의 알력 다툼이 있었다. 정확한 내용은 나도 다 알지 못했다. 원로들 사이에서 후계 문제로 뭔가가 틀어졌다는 소문만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다. 다만 그날, 다현이 홀로 어떤 자리에 나가야 했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녀는 그 전날 밤 나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내일은 좀 늦을 거야"라는 한마디뿐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동행하지 못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내가 못 지킨 것이다. 그날 하필 다른 급한 일이 겹쳤고, 다현은 자기 혼자 처리하겠다며 나를 그 자리로 부르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그날 밤 다현은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깨에 감긴 붕대가, 그녀의 상태보다 내 마음을 더 후벼 팠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너한테 나는 뭐야." 그녀가 물었다. 붕대를 감은 팔로, 나를 똑바로 보면서. 목소리는 담담했는데,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무섭게 들렸다. "내가 다치는 걸 봐도, 네 표정은 그냥 그대로야. 왜 그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았는데, 얼굴은 그걸 하나도 표현하지 못했다. 원래 표정이 없는 얼굴이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원망했다. "그냥 일이라서 그런 거야? 그냥 계약이라서?" "아닙니다." "그럼 뭔데." 그 질문에 나는 끝내 답을 하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있는 답을 입 밖으로 꺼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호위무사였고, 그녀는 가문의 당주였다. 그 이상의 감정을 품는다는 건, 애초에 선을 넘는 일이었다. 그 선을 넘는 순간,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사표를 냈다. 정확히는, 사표라는 형식도 갖추지 못한 채 그냥 짐을 싸서 나왔다. 다현은 붙잡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붙잡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나왔고, 그녀는 그런 나를 그냥 보내줬다.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돌아봤을 때, 그녀는 창가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게 벌써 팔 개월 전 일이었다. "나에게 당신은 무엇인가." 그 질문은 아직도 내 안에 박혀 있었다. 뽑아낼 수도 없고, 그냥 두면 계속 쑤시는, 그런 종류의 가시였다. 하필이면 잠들기 직전에 제일 아프게 찔러오는 가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별로 시원하지도 않은데, 괜히 몇 번이나 숨을 크게 들이켰다. 폐 속까지 서늘한 공기를 밀어 넣으면 뭔가 정리가 될까 싶었는데, 별 효과는 없었다. 오늘 도장에 왔던 남자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정중한 옷차림에, 청화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패를 목에 걸고 있던 자였다. 그는 도장 문턱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당주님께서 도장주님을 다시 찾고 계십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남자는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결국 인사만 남기고 돌아갔다. 왜 지금 와서. 팔 개월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스스로에게 여러 번 물었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혹시 무슨 급한 일이 생긴 걸까. 아니면 그냥 예전처럼 사람이 필요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나여야 할 이유가 따로 있는 걸까. 온갖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뒤엉켰지만, 그중 어느 것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다현이 나를 다시 찾는다는 사실이 나를 반갑게 만들지 않았다는 거다. 오히려 두려웠다. 반갑다는 감정보다 두려움이 먼저 치고 올라왔다는 게, 스스로도 좀 우스웠다. 사람이 그리웠으면서, 그 사람이 진짜로 다시 나타난다니까 도망가고 싶어지는 이 마음은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나. 그때 지키지 못한 것을, 지금 다시 지켜야 할 상황이 온다면. 나는 그럴 자격이 있을까. 한번 도망친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라는 게 정말로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스스로 만든 핑계에 불과한 걸까. 나는 이불을 걷어차듯 뒤척이며 그런 생각들과 씨름했다. 창밖으로 달이 유난히 밝았다. 그 빛을 한참 보다가, 나는 창문을 닫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눈을 뜨면 텅 빈 천장이 번갈아 나를 맞았다. 결국 밤새 눈만 감았다 떴다 반복하다가, 새벽 어스름이 밝아올 무렵에야 얕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꿈속에서도 나는 그녀의 질문에 답을 못하고 있었다. 꿈속의 나는 팔 개월 전 그날처럼 그대로 굳어 있었고, 다현은 여전히 붕대를 감은 팔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한테 나는 뭐야. 그 목소리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마치 대답을 듣기 전에는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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