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해뜨기 전, 왕녀의 신랑

4화

쪼르륵. 빗자루로 쓸어 담은 흙먼지가 쓰레받기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저녁 무렵의 마당은 노을빛에 젖어 붉었고, 나는 그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괜히 빗질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 대문 쪽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오빠!" 지우였다. 목소리만 들어도 저 팔짱을 낀 채 눈을 부라리고 있을 게 뻔했다. 나는 빗자루를 세워두고 고개를 돌렸다. 경야는 카페 앞치마도 벗지 않은 채로 헐레벌떡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 뭔가를 든 걸 보니 급하게 나온 모양이었다. 지우는 예상대로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오빠, 얼굴이 왜 그래." "어떻긴, 그냥 이 얼굴이지." "넉살 좀 그만 부려. 청화 가문에서 사람 왔었다며." 지우는 스물넷인데, 잔소리하는 것만 보면 마흔은 된 것 같았다. 나는 마당 한쪽 평상에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평상은 나무가 삭아서 앉을 때마다 삐걱, 소리를 냈다. "별거 아니라니까. 그냥 안부 확인이었어." "오빠." 지우가 내 앞에 딱 서서 팔을 벌렸다. 그 자세가 어쩐지 재판정에서 판결문 읽는 판사 같았다. "청화 가문이 굳이 사람을 보내서 안부만 확인할 리가 없잖아. 오빠 진짜 그렇게 순진해?" "……." 대답할 말이 없어서 나는 그냥 눈을 피했다. 경야가 옆에서 웃으며 끼어들었다.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였다. "됐고, 우리 그거보다 더 중요한 얘기하러 왔어." "뭔데." "친선 시합." 순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친선 시합." "몰라? 다음 주에 왕실 후원으로 검술 친선 시합 열린다는 거. 여러 가문 검사들 다 모인대. 그리고 설란국에서도 참가한다더라." 설란국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나는 어제 도장에 왔던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최근 가문 내부가 뒤숭숭하고, 설란국 쪽에서 사람이 왔다 갔다 한다던 그 말.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이렇게 다시 들으니 목덜미가 서늘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없으면 그냥 관전만 하고 오면 되잖아. 뭘 그렇게 겁먹어." 지우가 팔짱을 풀며 내 옆에 앉았다. 평상이 또 삐걱거렸다.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오빠, 나 다 알아. 요즘 오빠가 얼마나 사람들 피하고 사는지. 도장 안에서만 살면서, 누구랑도 깊게 안 얽히려고 하는 거." "……." "근데 그렇게 살면 안 돼. 언제까지 그 자리에 숨어있을 거야." 그 말에 나는 잠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우의 말이 맞았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살기로 결심했다. 누구와도 깊게 얽히지 않고, 조용히, 도장 안에서만. 머릿속으로 지난 몇 달을 되짚었다. 아이들 가르치고, 마당 쓸고, 밥 먹고, 자고. 그게 내 하루의 전부였다. 가끔 경야가 카페에서 남은 빵을 싸 들고 오면 그게 유일한 외출 아닌 외출이었다. 다현과의 관계는 이미 끝났다고 스스로 결론 내렸다. 다시 다가갈 자격도 없다고. 그러니 이제는 누구와도 새로운 인연을 만들지 않고, 그냥 이렇게 도장 하나 지키며 사는 게 나한테 맞는 삶이라고. 그렇게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나 그냥 이렇게 살 거야." 내가 입을 열자 경야와 지우가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뭐?" "이제 누구랑도 깊게 얽힐 생각 없어. 도장 운영하고, 애들 가르치고, 그렇게 조용히 살 거야." 지우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오빠, 그거 도망치는 거잖아." "도망 아니야. 그냥 내 자리를 찾은 거지." "자리가 아니라 그냥 숨는 거야, 지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우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격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없으면 없는 거지, 억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경야가 한숨을 내쉬며 앞치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초대장처럼 보이는 종이였다. 금박으로 테두리를 두른 게 딱 봐도 왕실에서 나온 물건이었다. "이거, 친선 시합 관전 초대장이야. 지우가 이미 답장 보냈어." "뭐?" "오빠 이름으로." 나는 그 종이를 뺏어서 확인했다. 진짜였다. 이미 관전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필체도 지우 특유의 각진 글씨체 그대로였다. "야, 지우. 너 이거 언제 보낸 거야." "오빠가 어제 그 남자 만나고 온 다음 날 바로." "허락도 안 받고?" "허락받으면 오빠가 순순히 갔겠어?" 말이 안 나왔다. 반박할 말을 찾다가 결국 포기했다. 지우 저 성격에, 이미 답장까지 보낸 걸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빠 무조건 가는 거야. 안 그러면 나 매일 도장 와서 오빠 감시할 거야." 지우의 눈빛이 진지했다. 저 성격에 진심으로 매일 오겠다고 하면, 진짜 매일 온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예전에 내가 밥을 며칠 굶었다고 오해했을 때도, 지우는 정말로 일주일 내내 도장에 찾아와서 반찬을 싸 들고 왔었다. "…알겠다, 가면 되잖아." 마지못해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만 응하고, 그저 관전석에 앉아 있다가 조용히 나오면 되는 거니까. 얽힐 생각은 없다. 그냥 얼굴만 비추고 오면 된다. 경야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웃으며 초대장을 다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잘 생각했어. 그날 나도 시간 맞춰서 갈게. 경기 끝나고 다 같이 저녁이나 먹자." "뭘 또 저녁까지." "오빠 요즘 얼굴이 반쪼가리인 거 몰라? 살 좀 붙여야지." 지우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맞아, 완전 홀쭉해졌어. 도장 밥이 그렇게 부실해?" "부실 안 해. 그냥 원래 이렇게 생겼어." "거짓말하는 거 다 보인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더 떠들다가, 해가 완전히 저물 때쯤에야 돌아갔다. 경야는 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고, 지우는 대문을 나서면서까지 "그날 진짜 안 오면 알아서 해"라는 말을 덧붙였다. 혼자 남은 마당은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빗자루를 마저 들고 남은 흙먼지를 쓸었다. 쓱, 쓱. 규칙적인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머릿속은 전혀 규칙적이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왜인지 잠자리에 들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초대장에 적힌 날짜를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설란국 참가. 그 단어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뭔가 큰 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이 자꾸 들었을 뿐이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뒤척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초대장을 다시 펼쳤다. 관전 명단 맨 아래, 내 이름 옆에 적힌 참가 가문 목록을 눈으로 훑었다. 익숙한 이름들 사이에, 낯선 글자 하나가 유난히 눈에 밟혔다. 설란국 대표, 이하람.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왜인지 손끝이 차가워졌다. 어디서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마음이 요동쳤다. 나는 초대장을 다시 접어 서랍 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쓰며 애써 눈을 감았지만, 그날 밤은 유독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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