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청명 백작가의 대연회장은 촛불 수백 개가 동시에 흔들리는 것처럼 밝았고, 그 빛이 대리석 바닥에 부서져 반사될 때마다 이서윤은 자신이 마치 무대 위에 올려진 인형처럼 서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마치 얼음을 깎아 만든 것처럼 차갑게 반짝였고, 그 아래로 오가는 귀족들의 웃음소리와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겹겹이 쌓여 하나의 낮은 소음이 되어 연회장을 채우고 있었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현악 연주 소리가 그 소음 사이를 파고들었지만, 서윤의 귀에는 그 선율마저도 뭉개져 들려왔다.
아버지가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계속 설명하고 있었다. 온후 후작가의 가문이 지닌 영지의 규모라든가, 오늘 발표될 혼약이 앞으로 어떤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들은 유리창 너머의 빗소리처럼 뭉개져 들어왔고, 눈은 자꾸만 연회장 저편의 한 남자에게로 미끄러졌다.
짙은 갈색 머리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그는,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조각처럼 정갈한 자세로 서 있었는데, 검은 예복의 단추 하나까지도 흐트러짐 없이 채워진 모습이 마치 잘 만들어진 세트장 위에 놓인 배우처럼 보였다. 그 완벽함이 오히려 서윤에게는 낯설고 서늘한 인상을 남겼다.
온후 후작가의 적남 강도현.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와 정식으로 혼약을 발표할 상대의 이름이었다.
서윤은 자신의 손끝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이것이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손에 쥔 부채의 뼈대가 손바닥에 눌리는 감각마저 지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귀족 영애로 태어난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으므로, 새삼스레 떨릴 이유는 없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그럼에도 심장은 자꾸만 갈비뼈 안쪽을 두드려댔다.
'긴장할 필요 없다. 이미 정해진 일이다.'
'다들 이렇게 결혼하지 않나. 나만 특별할 것 없다.'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는 사이, 사회를 맡은 시종장의 목소리가 연회장 전체를 울렸다.
“청명 백작가의 영애, 이서윤 양과 온후 후작가의 공자, 강도현 공이 혼약을 맺으심을 이 자리에서 알려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로 모여들었고, 서윤은 그 수많은 눈동자 아래에서 자신의 어깨가 조금씩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도현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걸음걸이는 흐트러짐이 없었는데, 그 반듯함이 서윤에게는 오히려 두려움처럼 느껴졌다. 마치 훈련된 짐승이 정해진 동선을 따라 걷는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그 자신도 이 절차가 지겨운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잠깐 스쳤다가도, 감히 그런 짐작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마치 얼어붙은 호수 같아서,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눈매는 짙고 깊었지만, 그 깊이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텅 비어 있는 것인지 서윤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서윤은 예의를 갖춰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치맛자락이 바닥에 스치는 소리마저도 이 순간에는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았는데, 그 순간 도현의 시선이 그녀를 스치듯 지나쳐 연회장 저편 어딘가로 향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시선의 끝을 따라가 보니, 그곳에는 화려한 은발의 여인이 조용히 서 있었다. 붉은 드레스 위로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이 촛불에 반사되어 유독 눈에 띄었고, 그녀 주변에는 마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라도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함부로 다가서지 않는 듯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도현의 눈빛이 그 순간만큼은 다른 온도를 지녔다는 것을 서윤은 분명히 느꼈다. 얼어붙은 호수 같던 눈동자에 아주 짧은 순간 물결이 이는 것 같기도 했고, 그것이 반가움인지 그저 습관적인 응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을 향할 때와는 다른 무언가였다.
'저 눈빛은, 적어도 나를 향한 것은 아니구나.'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서윤은 이상하게도 슬프다기보다는 담담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는데, 어쩌면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이 결혼은 애정을 전제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가슴 한켠이 조금 서늘해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도현이 다시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을 때,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고, 그저 형식적인 예를 갖춰 손을 내밀 뿐이었다.
“이서윤 양.”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그가 이름을 불렀을 때, 서윤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감추며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겨우 그 짧은 인사말 하나에 이토록 긴장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우스웠지만, 웃을 여유는 없었다.
그의 손은 예상보다 차가웠고, 그 냉기가 손끝을 타고 팔뚝까지 스며드는 것 같아서 서윤은 순간 숨을 삼켰다. 마치 오랫동안 눈밭에 두었던 조각상의 손을 잡은 것 같은 감각이었는데, 그 손끝에서 느껴지는 굳은살마저도 이 남자가 검을 쥐어본 사람이라는 사실을 무심코 알려주는 것 같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서윤이 겨우 그 말을 뱉어냈을 때, 도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무례하다기보다는, 원래부터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는데, 서윤은 그 짧은 반응 하나에도 온갖 의미를 붙여보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연회장 안의 모든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려 있는 가운데, 도현은 짧게 목례를 하고는 그녀의 손을 놓았는데, 그 짧은 접촉이 마치 형식적인 절차의 일부였을 뿐이라는 걸 서윤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어떤 무게 같은 것을 느꼈고, 그것이 자신을 향한 관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주변에서 축하의 인사와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누군가는 두 가문의 결합을 두고 왕국에 큰 경사라 말했고, 누군가는 서윤의 드레스가 아름답다며 덕담을 건넸지만, 서윤의 귀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앞에 놓인 미래가, 저 차가운 눈동자를 가진 남자와 함께여야 한다는 사실만을 되새기며, 애써 입가에 미소를 걸어 올렸다. 뺨의 근육이 조금씩 뻐근해질 만큼 오래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서윤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 미소가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을지, 서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연회가 끝나갈 즈음,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하고 촛불의 일부가 사그라들어 연회장의 빛이 처음보다 한결 옅어졌을 무렵, 도현은 다시 그 은발의 여인이 있던 자리를 흘긋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리를 뜬 뒤였고, 그 사실에 그의 눈매가 아주 잠깐 굳어지는 걸 서윤은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표정에는 분명한 균열이 있었다.
그 표정의 의미를 굳이 묻지 않았지만, 서윤은 그 순간 하나의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혼약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자신은 그의 마음 밖에 서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확인한 채로도 이 결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 서윤은 아직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