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나를 원하지 않는 남자

3화

겨울이 깊어질 무렵, 서윤은 온후 후작가에서 열린 소규모 다과회에 초청을 받았다. 초청장을 받아 든 순간에도 별다른 감흥은 없었는데, 그날의 주최자가 도현의 어머니인 한여옥 부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는 오히려 마음이 조금 놓였을 정도였다. 도현과 마주 앉아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보다는, 그의 어머니와 차 한 잔을 나누는 편이 몇 배는 수월할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마차에서 내려 후작가의 정원을 지나는 동안, 서윤은 늦겨울의 찬 공기가 코끝을 스치는 것을 느끼며 옷깃을 여몄다. 정원의 나무들은 이미 잎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는데, 그 위로 옅게 내린 눈이 마치 설탕을 뿌린 듯 반짝이고 있었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면서도 서윤은 별다른 긴장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응접실 문 앞에 다다랐을 무렵, 문 너머로 도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그녀는 걸음을 멈춰 세웠다. 시종 역시 안에서 대화가 이어지는 것을 눈치채고 잠시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기다리는 눈치였다. "다경 아가씨는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낮게 흘러나온 그 이름에, 서윤의 발끝이 순간 얼어붙었다. 서다경. 다경 공작가의 영애이자, 이미 타국의 대공가로 시집을 간 것으로 알고 있는 여인의 이름이었다. 왜 이 자리에서, 그것도 도현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지 서윤은 잠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인한 여인의 이름을 이토록 다정하게 부를 이유가 무엇인가 싶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애 소식은 나도 얼마 전에야 들었단다. 대공가에서도 잘 적응하고 있다더구나." 한여옥 부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대답했지만, 서윤의 귀에는 그 다음에 이어진 도현의 짧은 침묵이 더 크게 들렸다. 아무 말도 없이 흐르는 그 몇 초가, 어째서인지 서윤의 가슴 한쪽을 무겁게 눌러왔다. 시종이 문틈을 살짝 열어 안을 확인하려던 순간, 서윤의 시야에 도현의 얼굴이 스쳐 들어왔다. 지금까지 그녀가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평소의 냉담함, 그 단단하고 무뚝뚝한 얼굴선은 그대로였지만, 그 위로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분명 그리움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눈매가 살짝 아래로 처지고, 입술이 무언가 삼키듯 굳게 다물려 있었다. 서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자신의 심장이 이상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에게도 저런 표정이 있었구나.' 자신을 마주할 때는 늘 벽처럼 굳어 있던 얼굴이었는데, 지금 저 표정은 얼음이 잠깐 녹아내린 자리처럼 낯설고도 서글퍼 보였다. 평소의 냉담함과는 전혀 다른, 부드럽고도 아픈 듯한 그 얼굴을 서윤은 처음 보았고,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묘하게 명치를 눌러왔다. 그런데 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인기척을 느낀 시종이 마침내 문을 열어주었을 때, 서윤은 애써 평온한 얼굴을 만들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도현은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다시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마치 방금 전의 그 표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순식간에 얼굴 위로 두꺼운 유리 한 장을 씌운 것처럼 매끈했다. 그는 자리에서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서윤 양, 어서 오세요." 한여옥 부인이 반갑게 손을 내밀며 그녀를 맞았고, 서윤은 그 온기 어린 손길에 잠시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부인의 손은 늙은 나무의 결처럼 부드럽고 따뜻해서, 그 온도만으로도 방금 들은 이야기의 서늘함이 조금은 희석되는 듯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은은한 꽃차 향이 응접실을 채웠고, 창밖으로는 정원의 눈 덮인 나무들이 그림처럼 서 있었다. 시종이 조심스럽게 다과를 내려놓는 소리, 찻잔이 접시에 부딪치는 작은 소리들이 그 사이를 채웠다. 겉으로는 평온하게 흘러가는 자리였다. 부인은 최근 사교계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화들을 늘어놓았고, 서윤은 적절한 순간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대답을 얹었다. 그러나 서윤은 시종 도현의 옆얼굴을 곁눈질하며 조금 전 들었던 대화의 잔상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의 옆얼굴은 조각처럼 단정했지만, 그 단정함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서윤은 이제 알아버린 것 같았다. '그 사람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거구나.' 그 생각이 서윤의 마음 안에서 서서히 형태를 갖춰가는 동안, 그녀는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거나 억울한 감정이 솟구치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오히려 그것은 어떤 확인, 혹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시 한 번 확인받는 절차처럼 느껴졌다.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에 무슨 상처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그런 자조적인 물음이 스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한여옥 부인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공기를 알아차렸는지, 몇 번이나 화제를 바꾸어가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려 애쓰는 눈치였다. 도현은 어머니의 말에 짧게 대답을 얹으면서도, 시선은 좀처럼 서윤 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다과회가 끝나갈 즈음, 도현이 짧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윤에게 목례를 남기고 먼저 응접실을 떠났다. 인사도 지극히 형식적이었고, 걸음도 지체 없이 곧았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윤은 특별한 동요 없이 그저 담담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이 접시에 부딪치며 작은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한여옥 부인의 눈에는 이상하게 비쳤던 것 같았다. 부인은 아들이 사라진 문 쪽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서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윤 양은... 참 강단이 있구나." 부인이 조용히 건넨 그 말에는, 어쩐지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는 듯했다. 서윤은 옅게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지만, 속으로는 스스로도 이 담담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상처받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명치가 여전히 무거웠고, 상처받았다고 하기에는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가 조용히 자리를 잡았을 뿐이었다. 한편 응접실을 나선 도현은 복도를 걸으며, 방금 전 서윤의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놀라거나 상처받은 기색 하나 없이, 그저 평소와 같은 얼굴로 찻잔을 들던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그의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창밖의 눈 덮인 정원을 지나쳐도, 그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겹쳐 보였다. '보통이라면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언짢아하거나 서운해할 텐데.'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도현은 자신이 처음으로 이서윤이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낯선 감정에 스스로도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걸음이 잠시 멈춰 섰고, 손끝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 당황스러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현은 아직 그 답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복도의 끝,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에는 방금 내린 눈이 나뭇가지마다 얇게 쌓여 있었다. 도현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서윤이 앉아 있던 자리, 그 담담한 옆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그것이 왜 이토록 마음에 걸리는지, 그는 스스로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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