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며칠 뒤, 후작가의 저택 한켠에 마련된 연습장에서 작은 수련 자리가 열렸다. 서윤은 도현과 함께 그 자리에 참관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후작가에 대대로 이어져 온 관례였다. 혼약자들이 서로의 일상 영역을 조금씩 익혀가는 절차, 라고 시녀는 설명했지만 서윤에게는 그저 낯선 세계의 낯선 규칙 중 하나로만 느껴졌다.
연습장은 넓고 서늘했다. 벽 한쪽에는 손잡이가 닳은 검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고, 바닥은 오래된 나무로 짜여 있어 발을 디딜 때마다 낮은 소리를 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겨울빛이 회색으로 내려앉아 있었고, 그 빛 속에서 나무 바닥이 내뿜는 서늘한 기운이 발끝을 타고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서윤은 그 냉기보다, 검을 쥔 도현의 모습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기고 있었다.
평소의 그는 무표정했다. 식탁에서도, 마차 안에서도, 그의 얼굴은 언제나 하나의 굳은 표면 같았는데 — 지금 검을 든 그의 움직임에는 그 표면 아래 감춰져 있던 어떤 절제된 열기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발을 내딛는 순서, 검을 회전시키는 손목의 각도, 숨을 고르는 짧은 순간의 정적까지, 그 하나하나가 어떤 규칙을 따르면서도 동시에 사람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매끄러워서, 서윤은 마치 잘 짜인 영상 속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 사람도 저렇게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 생각이 들자마자, 서윤은 자신이 그를 조금 더 알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스스로도 당황했다. 그를 안다는 것,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 그저 저 절제된 열기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왜 궁금할까. 그런데 왜?
수련이 길어질수록 도현의 이마에는 땀이 배어들었다. 몇몇 검을 상대로 짧게 겨루던 그는 마지막 상대를 물러서게 한 뒤, 검을 거두며 소맷단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 순간, 발밑의 나무 바닥에 미끄러진 물자국 — 아마 앞서 겨루던 이가 흘린 땀이었을 것이다 — 을 밟으며 그의 몸이 순간 크게 기울었다.
서윤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의 팔을 붙잡은 순간, 두 사람의 몸이 순식간에 가까워지며 서윤의 손끝에 도현의 옷을 통해 스며드는 단단한 근육의 감촉과 미세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옷은 얇았고, 그 안의 체온은 놀라울 만큼 뜨거웠다.
"아, 죄송..."
서윤이 놀라 손을 떼려 했지만, 도현이 오히려 그 손을 지그시 붙잡았다. 자세를 바로잡기까지 몇 초의 시간이 더 걸렸는데, 그 짧은 접촉의 순간 서윤의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끝, 손목, 팔꿈치를 지나 어깨까지 — 그 짧은 몇 초 동안 그녀의 몸 전체가 그 접촉 하나에 반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현 역시 그 짧은 순간, 예상치 못한 손길에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던 것 같았다. 평소라면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는 듯 몸을 곧게 세우고 거리를 두었을 텐데, 이번에는 서윤의 손이 자신을 붙잡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낯설게 다가왔다. 낯설다, 라는 감각은 그에게 흔한 것이 아니었다.
'이 여자, 생각보다 반응이 빠르군.'
그 생각과 함께, 도현은 자신의 팔을 붙잡은 그 작은 손이 의외로 단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손끝에는 굳은살 같은 것도 살짝 만져졌는데, 그것이 어디서 생긴 것인지 잠시 궁금해졌다가, 곧 지금까지 자신이 그녀를 그저 형식적인 존재로만 여겨왔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했다. 혼약자, 라는 이름표만 붙여둔 채 정작 그 안의 사람을 보려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자세를 바로잡은 뒤, 도현은 어색하게 손을 놓으며 짐짓 무심한 얼굴로 돌아갔다. 손을 놓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잠깐 서윤의 손끝을 향했다가 이내 거두어졌다. 그 짧은 순간의 온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괜찮으시오?"
그가 짧게 물었을 때, 서윤은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형식적인 예의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도현의 말투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 짧고, 예스럽고, 감정이 묻어 있는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는 어조. 그런데도 어쩐지 그 목소리에 평소와는 다른 결이 섞여 있는 것 같다고, 서윤은 느꼈다.
"네, 괜찮습니다."
서윤이 짧게 대답하며 시선을 내렸지만, 손끝에는 여전히 그의 팔에서 느껴졌던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손을 가만히 접었다 펴 보았지만, 그 감촉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연습장의 서늘한 공기만이 그 사이를 채웠다. 저 멀리서 다른 검사들이 검을 정리하는 소리, 나무 바닥을 스치는 발소리 같은 것들이 그 침묵을 오히려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저택의 하인이었다. 하인 하나가 급히 다가와 도현에게 무언가를 낮게 보고했는데, 고개를 숙인 채 속삭이듯 전하는 그 말을 서윤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그 내용을 듣는 도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는 것만은 놓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짐짓 무심하게 유지하려던 얼굴이, 이번에는 진짜로 굳어버린 것 같았다.
"지금... 그 사람이 왔다고?"
도현이 낮게 되묻는 목소리에는, 방금 전 서윤과의 접촉으로 흔들렸던 기색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동요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당혹이라기보다는 — 오래 눌러두었던 무언가가 갑작스럽게 표면으로 떠오른 사람의 얼굴이었다.
서윤은 그 대화의 내용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도현의 얼굴에 스치는 그 낯선 긴장감만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자신과는 무관한 어떤 인물, 혹은 어떤 과거와 관련된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 사람'이라는 말 속에 담긴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도.
도현은 더 이상 서윤을 돌아보지 않았다. 검을 하인에게 넘기듯 건네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습장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빨라진 것을, 서윤은 그 뒷모습을 보며 알아챘다. 무언가에 쫓기듯, 혹은 무언가를 향해 서둘러 가듯.
서윤은 그 뒷모습을 향해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붙잡을 이유도, 자격도 없었으니까. 그저 방금 전 손끝에 남았던 온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것을 가만히 느끼며,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 문 너머로 사라진 도현의 얼굴에 스쳤던 그 낯선 동요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 사람'이라는 두 글자가, 서윤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