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극혐남의 자립 선언

1화

6월의 오후였다. 동아리실 복도에는 클래식기타 선율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준호는 복도 끝에서 걸음을 멈췄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주머니 속 작은 카드 봉투를 꽉 움켜쥐었다. 봉투 모서리가 손가락에 눌려 살짝 구부러졌다. 편의점에서 세 시간을 고민하고 산 카드였다. 앞면엔 작은 기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너무 오버 아닌가.' 아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 준호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질문을 오늘 아침에도 또 던졌다. 오늘, 드디어 말할 생각이었다. 서윤아에게. 초등학교 때부터 옆집에 살았고, 중학교도 같이 다녔고, 고등학교도 우연인지 필연인지 또 같은 반이 됐다. 매일 아침 그녀는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고, 매일 그는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남들은 그걸 보고 사귀는 사이냐고 물었지만, 두 사람은 그런 게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준호는 알고 있었다. 적어도 자기 쪽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봄, 운동회 날. 넘어져서 무릎이 까진 그를 업고 보건실까지 뛰어갔던 게 서윤아였다. 그날 이후로 준호에게 서윤아는 그냥 옆집 친구가 아니었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1년, 도합 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마음은 한 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단단해졌다. '오늘은 진짜 말할 거야.' 그는 침을 삼켰다. 목이 바싹 말라 있었다. 동아리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기타 줄 튕기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에서 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낯설었고, 하나는 너무도 익숙했다. 준호는 원래 노크를 하려던 손을 슬쩍 내렸다.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상하게 발이 먼저 멈췄다. "윤아야, 근데 진짜 신기해." 하은지의 목소리였다. 서윤아와 같은 클래식기타 동아리 부원. 준호는 발을 멈춘 채로 문틈에 가까이 다가섰다. 기타를 조율하는 듯 현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뭐가." 서윤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하고 낮았다. 준호는 그 목소리만 들어도 웃음이 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랬다. 몇 초 후에 자신의 세계가 뒤집힐 거라는 걸 전혀 모른 채로. "그 이준호라는 애 말이야. 매일 아침 너 데리고 오잖아." 준호의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 좋은 예감이 들었다. 혹시 자기 얘기가 나온 김에, 카드를 주기 딱 좋은 타이밍이 되지 않을까 하는 얕은 계산도 스쳤다. '지금 들어갈까?' 아니, 조금만 더 듣고. "그거? 데리고 오는 거 아니고 내가 데리고 다니는 거지." 서윤아의 대답에 웃음소리가 섞였다. "그래도 좋아하니까 매일 챙기는 거 아니야?" 순간 공기가 멈춘 것 같았다. 준호는 숨을 죽였다. 대답을 기다렸다.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이런 질문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남들 눈에도 뭔가 보인다는 뜻 아닐까. "좋아하긴 뭘 좋아해." 서윤아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저 남자 진짜 극혐이야." 순간 준호의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다시 들어야 했다. 다시, 정확하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숨을 참았다. 카드 봉투를 쥔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와 종이 표면을 눅눅하게 적셨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침에 깨우는 것도 일이고, 넥타이도 매일 삐뚤빼뚤하고, 밥도 안 챙겨 먹으면 하루 종일 짜증 내고. 자립이라곤 1도 안 되는 인간이야." 하나하나가 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부정할 수가 없어서 아팠다. "그래도 준호 착하잖아." "착한 거랑 상관없어. 그냥…… 옆에 두면 손이 많이 가는 애라고."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준호는 문틀을 짚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흘렀다. 문틀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는데도 열감이 가라앉지 않았다. '극혐.' 그 두 글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극혐. 극혐이라니. 지난 사 년간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단어였다. 하은지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래도 매일 넥타이 고쳐주고 헤어스타일도 손봐주면서. 그게 극혐인 사람한테 할 일이야?" 준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맞다. 그 말이 맞다. 윤아가 아침마다 넥타이를 바로 잡아주던 손길, 헝클어진 머리를 슥슥 정리해주던 손끝, 그게 다 무의미한 게 아니었을 거라고, 준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서윤아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냥…… 놔두면 진짜 꼴이 말이 아니게 다니니까 그런 거야. 내가 옆에서 안 잡아주면 걔는 그냥……" 말이 잠시 끊겼다. 기타 줄을 튕기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자립 못 하는 초등학생 같은 거지." 준호의 관자놀이에 핏발이 섰다. 초등학생. 그 단어가 귀에 꽂히는 순간,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무너지듯 재생됐다. 아침에 넥타이를 고쳐주며 웃던 얼굴. 식판에 반찬을 더 얹어주던 손. 비 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며 옆으로 붙던 걸음. 시험 전날 늦게까지 전화로 문제를 풀어주던 목소리. 체육대회 때 다친 발목에 파스를 붙여주며 잔소리하던 표정. 그게 전부, 그런 뜻이었다니. 애정이 아니라 관리였다니.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귀찮은 짐짝을 떠맡은 거였다니. 준호는 목구멍이 좁아지는 것 같았다. 숨을 쉬는데도 공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 나는, 지금까지 뭘 본 거지.' '내가 만든 착각인가, 아니면 진짜 착각당한 건가.' 머릿속이 뒤엉켰다. 정리가 되지 않았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준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벽 뒤로 붙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누군가 동아리실 앞을 지나갔다. 교복 치마 스치는 소리, 그리고 익숙한 향수 냄새. 다른 동아리 부원인 듯했다. 다행히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숨을 몰아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벽의 냉기가 등을 타고 척추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주머니 속 카드 봉투가 손안에서 구겨졌다. 기타 그림이 그려진 앞면에 손톱 자국이 남았다. 오늘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어진 것 같았다. '좋아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평생 옆에 있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준호는 카드를 다시 주머니 깊숙이 밀어넣었다. 손가락 끝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동아리실 안에서 하은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래도 윤아야, 너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거 맞아?" 목소리에 웬일로 조심스러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 준호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혹시. 혹시 지금이라도, 뭔가 다른 대답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제발.'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 짧은 몇 초가 준호에게는 몇 분처럼 느껴졌다.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문틈 너머의 정적을 노려봤다. 서윤아의 대답이 이어지기 전, 준호는 이미 그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발걸음이 자기 것 같지 않았다. 복도 바닥을 밟는 감각조차 흐릿했다. 뒷말을 듣지 못한 채로. 귀에는 오직 하나의 단어만 맴돌았다. 극혐.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그 단어가 발걸음에 맞춰 박자를 두드렸다. 극혐, 극혐, 극혐.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운동장을 가로지르면서도, 그 두 글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준호는 그날, 사 년 동안 품어온 마음을 주머니 속 구겨진 봉투와 함께 그대로 삼켜야 했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모른 채로, 그는 서윤아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내일 아침, 그녀가 또 초인종을 누를 텐데. 그때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문을 열어야 할지, 준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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