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극혐남의 자립 선언

2화

복도를 걸어가는 준호의 걸음이 자꾸만 흐트러졌다. 다리가 남의 것 같았다. 한 발 한 발이 무겁게 느껴졌다. 신발 밑창이 바닥에 닿는 소리마저 낯설게 울렸다. 타박, 타박.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 몸을 대신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극혐이라니.' 머릿속에서 그 단어가 계속 되풀이됐다. 마치 고장난 스피커처럼. 같은 지점에서 튀고, 튀고, 또 튀었다.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헛디뎠다. 난간을 붙잡고 겨우 균형을 잡았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두드리듯 쿵쿵 울렸다. '아니야. 잘못 들은 거 아니야?' 하지만 분명히 들었다. 두 번, 세 번, 확인하듯 되풀이해서 들었다. 극혐이라는 말도, 자립이라곤 1도 안 되는 인간이라는 말도, 초등학생이라는 말도. 모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억양까지 선명하게 기억났다. 웃으며 말했다. 가볍게,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그게 더 아팠다. 준호는 계단 아래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애들의 함성이 아득하게 들렸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들리는 소리 같았다. 공을 쫓는 아이들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흔들렸다. 지금까지의 모든 순간이 머릿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봄, 등굣길에 그녀가 넥타이를 고쳐 매준 날. 그때 준호는 그녀의 손끝이 목덜미에 닿았던 감촉을 며칠 동안 잊지 못했다. 밤에 이불 속에서 그 순간을 몇 번이나 곱씹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그게 관심의 신호라고, 그렇게 믿었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 그녀가 도시락에 계란말이를 더 얹어주며 웃었던 순간. 그날 준호는 하루 종일 실실 웃고 다녔다. 친구들이 왜 그렇게 헤벌쭉하냐고 물었을 때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스스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비 오는 날마다 우산을 나눠 쓰며 옆으로 붙던 걸음. 어깨가 부딪히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 우산 속에서 그녀의 어깨에서 나던 샴푸 냄새까지 기억났다. 그 모든 순간이, 사랑이 아니라 그저 '손이 많이 가는 애 관리'였다고? 숨이 턱 막혔다. 창틀을 짚은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힘이 들어갔다. '초등학생.' 그 단어가 가장 아팠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녀가 자신을 어른으로도, 남자로도, 아무것도 아닌, 그저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동안 자신이 그녀 앞에서 얼마나 멋있어 보이려고 애썼는지 떠올랐다. 체육 시간마다 일부러 그녀가 보는 방향으로 슛을 날렸던 것. 시험 성적이 오르면 제일 먼저 그녀에게 자랑했던 것. 전부 다, 그녀의 눈에 조금이라도 다르게 보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 비친 건 처음부터 끝까지 '초등학생'이었다. 준호는 창문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잠시나마 머릿속을 진정시켜주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신호들이 이미 있었다. 서윤아는 그를 '오빠'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동갑인데도 항상 이름을 부르거나, 아니면 그냥 "야"라고 불렀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존댓말을 섞어 쓰던 그녀가, 준호에게만은 늘 명령형이었다. "밥 먹어." "넥타이 좀 매." "머리 좀 다듬어." "핸드폰 좀 그만 보고 자." 그 말들이 하나씩 되살아나 귀에 박혔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관심이 아니라 잔소리였다. 애정이 아니라 관리였다. 준호의 눈앞이 뜨거워졌다. '바보였네. 나.' 지금까지 몇 년 동안, 그녀의 모든 행동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며 살아온 게 아닌가. 친구들에게 은근히 자랑까지 했었다. "걔가 나한테만 특별하게 잘해줘." 그 말을 할 때마다 친구들이 이상한 표정을 짓던 게 이제야 이해가 됐다. 다들 알고 있었던 걸까. 자기만 몰랐던 걸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귓가가 뜨겁게 타올랐다. 동아리실에서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 "자립이라곤 1도 안 되는 인간이야." 그 말이 사실이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준호는 스스로 아침에 일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항상 서윤아가 초인종을 눌러 깨워줬다. 넥타이도 스스로 맬 줄 알면서 굳이 그녀가 매주도록 놔뒀다. 식사도, 준비물도, 심지어 시험 기간 스케줄까지 그녀가 다 챙겨줬다. 빨래 개는 법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구분하지 못해 그녀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이제야 선명하게 떠올랐다. 한심하다는 표정. 그걸 애정으로 착각했다니. 그게 다 짝사랑의 증거라고 믿었는데. 실은 폐였다. 부담이었다. 짐이었다. 준호의 눈가가 붉어졌다.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릿한 통증이 오히려 머릿속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번졌다. 시야가 뿌옇게 흔들렸다. '그동안 나는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바보처럼 웃고 다녔던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은 얼굴이 뜨거워질 만큼 부끄러웠다. 이불킥을 백 번쯤 해도 모자랄 것 같았다. 그동안 자기 혼자 로맨스 영화를 찍고 있었던 셈이다. 주연은 자신이고, 상대역은 서윤아였고.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영화의 제목은 '보호자와 피보호자'였다. 로맨스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였던 것이다.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스스로도 헷갈렸다. 복도 저편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준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숨을 죽였다.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서윤아의 목소리가, 아까 그 방향에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아직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 목소리의 톤만으로도, 준호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도망칠까. 숨을까. 아니면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 얼굴을 마주할까. 준호는 그 어느 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발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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