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극혐남의 자립 선언

3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준호는 숨을 죽였다. 계단 뒤편의 그늘로 몸을 옮겼다. 등이 차가운 벽에 닿았다. 심장이 이상하게 크게 뛰었다.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서윤아가 복도를 지나갔다. 하은지와 나란히 걸으며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웃는 얼굴이었다. 평소와 다를 게 없는, 그 익숙한 얼굴이었다. 하은지가 뭐라고 말하자 서윤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마저 평소와 똑같았다. 준호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저 얼굴로, 나를 극혐이라고 했단 말이지.' 머릿속에서 조금 전의 목소리가 다시 재생됐다. 낮고, 단호하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던 그 목소리. 극혐이라는 두 글자가 귀에 콱 박혀서 빠지지 않았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같은 눈, 같은 코, 같은 입술인데도 낯설었다. 준호는 자신이 알던 서윤아와, 방금 스쳐 지나간 서윤아 사이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가고 발소리가 멀어졌다. 준호는 그제야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벽에 등을 대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바닥의 냉기가 교복 바지를 뚫고 올라왔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학생들의 발소리가 몇 번 더 들렸지만, 이제는 숨을 죽일 필요도 없었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여러 목소리가 뒤섞였다. '변명이겠지. 그냥 오늘 기분이 나빠서 그런 걸지도.' '아니,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그렇게 태연하게 할 수 있나?' 하지만 곧바로 다른 목소리가 그 생각을 짓뭉갰다. '아니야. 이건 오늘만의 일이 아니야. 계속 그래 왔던 거야.' 준호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아침마다 초인종을 누르러 온 서윤아의 표정이, 사실은 조금씩 지쳐 있었던 게 아닐까. 넥타이를 매줄 때 손끝이 조금 빠르게 움직였던 게, 사실은 얼른 끝내고 싶어서였던 게 아닐까. 밥을 챙겨줄 때 건네던 짧은 말들이, 사실은 형식적인 인사에 불과했던 게 아닐까. 전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왜 지금까지 그렇게 눈치가 없었을까. 왜 그 모든 신호들을, 자기 좋을 대로만 받아들였을까. 부끄러움이 얼굴로 확 몰려왔다. 귓가까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마치 발가벗겨진 채로 복도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아주 명확한 결론 하나가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다. '더 이상 폐 끼치지 말자.' 준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이 조금 흐릿했다. 그동안 서윤아가 챙겨준 모든 것들이, 사실은 부담이었다면. 그녀가 아침마다 초인종을 눌러야 했던 게, 그녀에게는 귀찮은 의무였다면. 그렇다면, 그 의무에서 그녀를 놓아줘야 했다. 스스로 일어나야 했다. 스스로 넥타이를 매야 했다. 스스로 밥을 챙겨야 했다. 지금까지 안 해온 모든 것들을, 지금부터 해야 했다. 손끝이 떨렸지만,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라 다짐 때문이었다. 준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릎이 삐걱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잠시 벽을 짚었다. 그래도 다시 걸었다. 주머니 속 구겨진 카드 봉투를 꺼내 보았다. 오늘 전하려던, 이제는 전할 수 없게 된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봉투 겉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름 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몇 번을 다시 쓰고, 몇 번을 지웠던 흔적이 종이 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준호는 그 흔적을 손끝으로 한 번 쓸어 보았다. 그리고는 봉투를 천천히 반으로 접었다. 다시 한번, 그리고 또 한번. 작게, 더 작게. 접힌 모서리가 손끝을 콱 찔렀지만 아프지 않았다.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버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 꺼낼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이제부터는 다르게 살아야지.'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듣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텅 빈 계단 사이로 작게 울렸다. 혼자 일어나고, 혼자 챙기고, 혼자 걸어가는 사람이 되자. 더 이상 그녀에게 짐이 되지 말자. 그리고, 무엇보다. 더 이상 옆에서 알랑거리며 그녀의 시간을 축내지 말자. 그 생각을 하자 가슴 한편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하지만 그 통증마저 견뎌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준호는 계단을 내려가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알람 설정 화면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알람이 울려도 무시하고 다시 잠들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오전 6시.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잠시 멈췄다. 평소보다 한 시간 반은 빠른 시간이었다. 숫자를 바꾸는 손가락이 유독 무거웠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해내야지.' 설정을 마치고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교문을 나서며 준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동아리실이 있는 건물 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가방끈을 고쳐 메고 그대로 앞만 보며 걸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이 평소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그날 밤, 준호는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방 안 불을 끄기 전, 책상 위에 다리미를 꺼내 놓았다. 낡은 다리미판을 펴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스스로 알람을 맞추고, 스스로 이불을 정리하고, 스스로 다음 날 입을 교복을 다려두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다림질이었다. 뜨거운 다리미가 옷깃에 닿을 때마다 손목이 움찔거렸다. 와이셔츠 소매에 이상한 주름이 잡혔지만, 그래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다리미를 정리하고 나서 손등을 살펴보니 작게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따끔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쯤은, 앞으로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우니 천장이 낯설게 보였다. 늘 서윤아의 목소리로 시작되던 아침을, 이제는 스스로 열어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실감 났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하나였다. '내일부터는, 진짜 달라져야 해.'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방 안으로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그 빛을 등지고, 준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다. 극혐이라는 두 글자가 눈을 감을 때마다 다시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준호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며 애써 그 생각을 밀어냈다. 다음 날 아침 6시, 알람이 울렸다. 짧고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리고 그 알람은, 아주 오랜만에, 서윤아가 아닌 준호 스스로의 손에 의해 꺼졌다. 손끝으로 화면을 두드리고 나서, 준호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키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결국 일어났다. 이불을 걷어내고, 두 발을 바닥에 딱 붙였다. 그 순간만큼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다. 준호는 그렇게 혼자서, 낯선 하루의 첫 발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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