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촬영이 끝난 뒤에도 유나의 앞머리는 결국 제대로 살지 않았다. 모니터 화면 속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던 실장이 미간을 좁히며 후반 작업에서 그 부분만 따로 보정을 거쳐야 한다는 지시를 내리는 순간, 스튜디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지는 것을 유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카메라 감독의 시선, 어시스트들의 눈치, 그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것 같아서 유나는 애써 표정을 다잡았지만 손끝은 이미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실패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는 도윤을 밀어낸 자신의 선택에 있다는 사실을 유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앎이 오히려 더 큰 오기로 번져나가면서 유나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새로운 스타일리스트를 붙여달라고 소속사 측에 요청했다.
"강도윤 씨 말고 다른 사람으로요."
담당 매니저에게 던진 그 한마디에는 자존심과 원망이 뒤섞여 있었고, 매니저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알겠다는 대답만 남긴 채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유나는 대기실로 돌아가는 내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앞머리를 손끝으로 만지며 '별거 아니야, 그냥 스타일이 안 맞았던 거야'라고 되뇌었지만, 그 되뇜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음 촬영에는 경력 많은 스타일리스트 두 명이 번갈아 배치되었다. 회사에서도 신경을 쓴 듯 이력이 화려한 인물들이었지만, 결과는 나아지지 않았다. 첫 번째 스타일리스트는 유나의 머리카락 결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지나치게 강한 열을 가해 끝부분을 상하게 만들었고, 그 뜨거운 열기가 두피에 닿을 때마다 유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참아야 했다. 두 번째는 유나가 원하는 각도를 세 번이나 다시 설명해야 할 만큼 감각이 맞지 않았는데, 손끝의 힘 조절부터가 어긋나 있어서 머리카락이 원하는 곡선을 그리지 못하고 자꾸만 뻣뻣하게 서버렸다.
"이 정도면 다시 손봐야 할 것 같은데요."
촬영 감독의 말에 유나는 입술을 깨물며 거울을 바라보았고, 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분명 익숙한 얼굴인데도 어딘가 어긋난 인상, 마치 퍼즐 조각 하나가 살짝 비틀려 끼워진 그림처럼 전체가 미묘하게 틀어져 보였다. 유나는 그 낯섦의 정체를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다. 그것이 도윤의 손길과 다른 손길 사이의 간극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유나 씨? 오늘 좀 예민해 보여요."
옆에서 촬영을 기다리던 오하늘이 다가와 물었다. 늘 그렇듯 티 없이 맑은 표정으로 걱정을 건네는 오하늘 앞에서 유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요즘 이것저것 안 맞아서."
"그 강도윤 디자이너님, 다시 오셨다면서요? 저번에 유나 씨 머리 만지는 거 봤는데, 확실히 다르긴 하더라고요."
오하늘의 무심한 한마디에 유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다르다는 것, 그것을 남에게 다시 확인받는 순간이 이상하게 아프게 다가왔다. 마치 이미 알고 있던 상처를 누군가 무심코 손끝으로 다시 짚어낸 것처럼, 명치 어딘가가 뻐근하게 조여왔다. '다르긴 하더라고요.' 그 말이 귓가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동안 유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짐을 챙기던 유나는 대기실 한쪽에 놓인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누가 놓아둔 것인지 짐작조차 못 한 채 유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그녀가 최근 즐겨 쓰던 헤어에센스와, 별다른 메모 없이 짧게 적힌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끝부분 상했으니 매일 발라요.'
필체는 낯익었다. 유나는 그 카드를 손에 쥔 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는데, 화가 나야 마땅한 상황에서 오히려 가슴 어딘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자신이 매니저를 통해 그를 잘라냈는데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머리카락 끝이 상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 그 사소한 배려가 왜 이렇게 크게 다가오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유나는 몇 번이고 카드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왜 이런 걸로.'
되뇌었지만 손끝은 이미 카드를 조심스럽게 지갑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스스로 지켜보면서도 유나는 멈추지 못했고, 대기실을 나서는 발걸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나 진짜 왜 이러지.'
다음 날 아침, 유나는 결국 다시 도윤을 찾아갔다. 스튜디오 안은 아직 조명이 절반쯤 꺼진 상태로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고, 구석에서 도구를 정리하고 있던 그의 뒷모습을 발견한 순간 유나는 잠시 멈춰 섰다. 정리하는 손끝의 움직임이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는 것이, 유나는 스스로도 낯설었다.
"그 에센스, 효과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발라볼게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도윤은 돌아보며 옅게 웃었는데, 그 웃음이 예전보다 조금 지쳐 보인다는 사실을 유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눈 밑에 옅게 내려앉은 그늘이나, 평소보다 조금 느려진 손끝의 움직임 같은 것들을.
"효과는 있을 거예요, 내가 골랐으니까."
여전히 여유로운 그 대답에 유나는 괜히 얄미운 마음이 들면서도, 동시에 명치 어딘가가 꽉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저 여유가 진짜인지, 아니면 자신처럼 애써 지어내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였다. 유나는 괜히 시선을 돌려 정리된 도구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 붙여달라고 한 거, 매니저한테 들었어요?"
"들었어요."
"그런데도 이런 걸 왜 챙겨줘요?"
도윤은 잠시 침묵하다가, 정리하던 브러시 하나를 손에 쥔 채 유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머리카락한테는 죄가 없으니까."
그 대답이 너무 담백해서 유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자신을 향한 원망이나 서운함 같은 건 조금도 담기지 않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대답. 그 무심함이 오히려 유나의 가슴을 더 헤집어놓았다.
그때 스튜디오 입구 쪽에서 낮은 발소리와 함께 정장을 갖춰 입은 중년의 남자가 들어섰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짓누르듯 울리는 소리에 스태프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 유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낯익은 실루엣, 낯익은 걸음걸이.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과 함께 유나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아버지가 여기 왜……"
서준혁이 유나와 도윤을 번갈아 바라보는 눈빛에는, 이미 무언가를 결정한 사람의 차가운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 시선이 도윤에게 머무는 짧은 순간, 유나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예감을 도무지 떨쳐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