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며칠 뒤, 컴백 화보 촬영을 위한 첫 회의가 열린 회의실에는 서준혁이 제시한 조건이 서면으로 정리되어 벽면 스크린에 그대로 띄워져 있었다. 이번 화보가 실패하면 도윤은 다시 계약을 해지당하고, 유나의 이미지 회복도 물 건너간다는 문구가 형식적인 활자로 박혀 있을 뿐인데도, 그 냉정한 조항 하나하나가 회의실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오전의 햇살이 대리석 테이블 위에 길게 늘어져 있었지만, 그 빛조차도 실내의 냉기를 데우지는 못했다.
도윤은 회의실 앞쪽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스타일링 콘셉트를 설명하는 중이었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어조로 문장을 이어가면서도 손끝으로 보드마커를 쥐는 자세가 유독 부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커 끝이 보드 위를 몇 번이고 헛돌 듯 스치며 스케치 선을 그리는 모습을, 스태프 몇몇은 그저 신중함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정작 도윤 자신은 손목 안쪽에서 뻐근하게 올라오는 통증을 마커를 쥔 힘으로 억누르고 있는 참이었다.
"이번 화보는 유나 씨의 원래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도윤이 스케치를 가리키며 말하자, 회의실에 앉은 스태프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몇몇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고, 몇몇은 펜을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스크린 속 조건을 다시 훑어보았다. "국민적 미소녀 이미지를 깨는 게, 지금 이 타이밍에 맞는 선택일까요?" 실장급 스태프 한 명이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목소리에는 반대라기보다 두려움이 섞여 있었는데, 회장의 조건이 걸린 마당에 도박에 가까운 결정을 내리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뜻이었다.
도윤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지금까지의 이미지로는 반년의 공백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얼굴을 보여줘야 회장님이 원하는 화제성도 나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지만, 그 단정함 속에는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의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실장은 잠시 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도윤의 눈빛이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 안의 웅성거림이 서서히 잦아들었지만, 그 침묵조차도 안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판단을 유보한 사람들의 정적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스태프들이 하나둘 자료를 챙겨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사이, 오하늘이 유나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도 이번 화보 서브 모델로 들어가게 됐어요. 잘 부탁드려요, 유나 씨." 그녀의 목소리에는 상큼한 친근함이 묻어 있었고, 웃음기 어린 눈매가 회의실 조명 아래에서 유독 또렷하게 빛났다. 유나는 반가운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행이다, 아는 얼굴이라도 있으니까." 낯선 스태프들 사이에서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던 유나에게는, 오하늘의 등장이 작은 안도였다.
오하늘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게요. 강도윤 디자이너님이랑도 얘기 잘 해볼게요, 저 사람 좋아하니까." 별다른 의미 없이 흘린 듯한 말투였는데, 유나는 그 말에 괜히 마음이 놓이면서도, 동시에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불편함이 스치듯 지나갔다. 사람 좋아한다는 말이 그저 동료로서의 호감을 뜻하는 것인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뜻하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구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나는 그 감정을 굳이 붙잡지 않고 이내 넘겨버렸지만, 명치 한쪽에 남은 옅은 이물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밤, 도윤은 스튜디오에 홀로 남아 유나의 화보용 가발 샘플을 손질하고 있었다. 작업대 위에는 색색의 인모 가닥과 스타일링 도구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고, 형광등 불빛 아래 그의 그림자만이 유독 길게 늘어져 있었다. 손목의 통증이 점점 심해져 가위질을 몇 번 하다 멈추고 손을 털어내는 동작을 반복했는데,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며 숨을 참는 표정이 스치듯 지나갔다. 손목 안쪽에서부터 시작된 열감이 손끝까지 번져 나가는 느낌이었고, 가위를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그는 애써 무시하려 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는 재빨리 밴드를 소매 안으로 밀어넣었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오하늘이었다. 그녀는 아직 촬영 관련 자료를 손에 든 채였는데, 늦은 시간까지 스튜디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아직 안 가셨어요?" "조금만 더 하면 끝나요." 도윤이 대답하며 다시 가위를 들었고, 오하늘은 그의 손끝을 잠시 바라보다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회장님도 이번 결과 엄청 신경 쓰시더라고요."
도윤은 그 말에 잠시 손을 멈췄다. "회장님이 직접?" 짧은 되물음이었지만, 그 안에는 여러 겹의 의문이 눌러 담겨 있었다. "네, 저한테도 이것저것 물으셨거든요. 촬영장 분위기라든지, 유나 씨 컨디션이라든지." 오하늘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흘렸지만, 도윤의 눈빛은 미묘하게 가늘어졌다. 마치 그 문장 속에 숨겨진 무언가를 감지한 사람처럼, 그는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회장이 왜 하필 오하늘에게, 그것도 촬영 전 분위기와 유나의 상태를 물었을까. 단순한 관심이라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계산된 냄새가 났다.
"그런 것까지 물으실 정도면, 신경을 많이 쓰시네요." 도윤은 담담하게 대꾸했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낮아져 있었다. 오하늘은 별다른 감정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요. 저도 좀 부담스럽더라고요, 뭘 그렇게 자세히 물으시나 싶고." 그녀의 태도는 태연했지만, 도윤은 그 태연함이야말로 더 신경 쓰였다. 회장이 자신에게 직접 압박을 주는 것도 아니고, 굳이 오하늘을 통해 정보를 캐낸다는 것은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는 이내 다시 가발로 시선을 돌리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하늘이 스튜디오를 나선 뒤, 도윤은 다시 손목을 살펴보았다. 붕대 아래로 스며 나온 붉은 흔적이 조금씩 번지고 있었고, 소매를 걷어 올린 손목 안쪽은 이미 열이 오른 듯 붉게 부어 있었다. 그는 이 상태로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촬영이 끝날 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생각과, 이대로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동시에 머릿속을 스쳤지만,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고, 화면에 뜬 것은 유나의 메시지였다. '내일 촬영, 늦지 말아요.' 짧은 문장 하나에 도윤은 옅게 웃으며 통증을 잠시 잊었지만, 그 웃음 뒤에 감춰진 손목의 열기는 여전히 식지 않은 채로 밤이 깊어갔다. 그는 화면을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보다가, 문득 오하늘이 흘린 말이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회장이 유나의 컨디션까지 물었다는 그 말이,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어떤 시험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붕대를 다시 조여 매던 도윤의 손끝이, 그 순간 미세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