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손대면 안 되는 전속 미용사

4화

서준혁 회장의 집무실은 통유리창 너머로 도심의 빌딩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압적인 공간이었고, 삼십 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야경은 마치 발밑에 흩어진 보석들 같았지만 유나에게는 그 화려함조차 낯설고 차갑게만 느껴졌다. 대리석 바닥에 반사된 조명이 두 사람의 발끝을 차갑게 비추었고, 그 안에 나란히 서 있는 유나와 도윤은 마치 서로 다른 세계에서 억지로 소환된 듯 미묘한 거리를 유지한 채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유나는 애써 도윤 쪽을 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그의 존재가 옆구리를 찌르는 듯한 압박감으로 느껴져 자꾸만 손끝을 매만졌고, 도윤은 그런 유나를 곁눈으로 흘긋 살피다가도 곧 무심한 얼굴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서준혁은 책상 뒤에 앉은 채 서류 한 장을 손끝으로 밀어 보내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앞으로 공식 전속 계약으로 묶기로 했다." 그 말은 마치 오늘 점심 메뉴를 정하듯 가볍게 던져졌지만, 유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유나는 순간 귀를 의심하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이 명치를 훑고 지나갔고, 그녀는 자신이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몇 번이고 되짚어야 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이미지 관리 차원이다." 서준혁의 목소리는 감정이 실리지 않은 채 건조했다. "강도윤 씨가 반년간 잠적한 이유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돌고 있어. 그런 소문을 차단하려면 오히려 공식적으로 못 박아두는 게 낫지." 유나는 도윤 쪽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서류를 훑어보며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 무표정함이 유나의 속을 더 뒤집어놓았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저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은 거야?' 유나는 속으로 물었지만,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도윤의 옆얼굴은 조각처럼 정갈했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그의 콧날에 걸려 부서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유나는 이상하게도 화가 났다.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자신의 인생을 뒤흔들 계약서에 손을 대려 하다니. "이건 저한테 묻지도 않고요?" 유나가 목소리를 높이자, 서준혁은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으며 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컴백 화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러니. 네 이미지도, 회사 매출도 이번 화보 결과에 달려 있다. 이 사람 실력이 필요하면 감정 따위는 접어둬." 감정 따위라는 말이 유나의 가슴에 서늘하게 박혔다. 아버지에게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딸의 마음보다 회사의 이익이 먼저였고, 유나는 그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생일마저 미팅 일정에 밀려 취소되던 날들, 아버지의 관심이 언제나 매출 그래프와 주가 지수 사이에서만 오르내리던 시절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다시 가슴 깊은 곳으로 눌러 담겼다. 이제 와서 서운함을 토로해봐야 무엇이 달라질까. 유나는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조건이 있습니다." 도윤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낮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서준혁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조건?" 도윤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화보 컨셉과 스타일링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제가 갖겠습니다. 그게 아니면 계약은 의미가 없습니다." 서준혁은 잠시 도윤을 응시하다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는 어딘가 시험하는 듯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자신 있다는 소리군." "결과로 증명하겠습니다." 짧고 단정한 대답에 서준혁은 서류에 서명을 하라는 손짓을 했고, 도윤은 망설임 없이 펜을 들었다.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유독 크게 울렸고, 유나는 그 소리 하나하나가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저 서명 한 줄로 자신의 반년이, 아니 앞으로의 몇 달이 완전히 도윤이라는 사람과 묶여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동의 없이. '내가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는 거지.' 유나는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아버지의 단호한 결정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는 언제나 무력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었다. 집무실을 나선 뒤,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유나는 참았던 말을 터뜨렸다. 문이 닫히고 숫자가 하나씩 줄어드는 그 짧은 시간이 유나에게는 견딜 수 없이 길게 느껴졌고, 결국 그녀는 옆에 선 도윤을 향해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대체 왜 다친 거예요." 순간 도윤의 시선이 흔들렸다. 아주 짧은, 그러나 유나는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으며 몰아붙였다. "소문 다 들었어요, 손을 다쳤다고. 그런데도 나한테는 한마디도 안 했잖아요. 왜요, 내가 알 자격도 없어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면서 존댓말 끝이 미세하게 갈라졌지만 유나는 애써 그것을 다잡았다. 도윤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려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 "그건 당신 마음대로 정하는 거 아니잖아요!" 유나의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에 울렸다. 좁은 공간 안에서 그녀의 말이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것 같았고, 도윤은 그 울림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미간을 좁혔다. "그때 당신이 갑자기 사라진 뒤로 나는—" 유나는 말을 하다 멈추었다. 목이 메어왔다. 반년 동안 연락 한 번 없이 사라졌던 사람을, 다시 이런 식으로 아버지의 계약서 위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원망과 그리움이 뒤섞인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도윤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완전히 나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설프게 돌아와서 네 머리를 또 실패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그 말에는 처음으로 감정이 섞여 있었고, 유나는 순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 때문이었다고?' 심장이 다시 한번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이 밀려왔다. 반년 전, 그 화보가 있던 날의 기억이 순식간에 눈앞을 스쳤다. 완성되지 못한 채 무너져버린 결과물, 그리고 그날 이후로 사라져버린 도윤. 그 모든 게 하나의 실로 이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유나는 목구멍이 꽉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며 입술을 벌렸다. 되묻고 싶었다. 정말 그것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더 있었는지. 하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대화는 그대로 끊겨버렸고, 도윤은 이미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유나는 그 옆얼굴을 바라보며, 방금 들은 말이 진심이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애꿎은 입술만 짓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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