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천 년의 계약자

1화

샹들리에 아래로 쏟아지는 빛이 마치 무수한 별처럼 부서지며 대무도회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설은서는 그 화려한 빛무리 한가운데 서서도 정작 자신이 이 자리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되리라는 걸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다인 왕국 사교계 최고의 행사인 이 무도회는, 왕태자 이헌과의 혼약을 오 년째 지켜온 그녀에게 있어 새삼스러운 자리가 아니었으나, 오늘만큼은 유독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털 장식이 미세한 바람에 흔들리며 잘게 부서지는 소리를 냈고, 은서는 그 소리를 들으며 괜히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런 무도회장의 공기를 몇 번이나 마주했던가. 처음엔 낯설고 무겁게만 느껴졌던 이 화려함이, 이제는 익숙한 옷처럼 몸에 붙어 있었는데도, 오늘은 왜인지 옷깃이 목을 조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은서는 어머니가 물려주신 사파이어 목걸이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저 멀리 단상 위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이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들떠 보이는, 아니 초조해 보이는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 년간 그의 곁에서 국정을 살피고, 남부 동맹 조약의 초안을 밤새 다듬으며 외교 담당까지 도맡아온 그녀였으니, 오늘 같은 공식 석상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옆에서 지나가던 백작 부인이 눈인사를 건네자 은서는 습관처럼 우아한 미소로 답했고, 그 미소가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오 년이면 이런 얼굴 하나쯤 만들어내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걸, 그녀는 새삼 깨달았다. 진짜 감정과 겉으로 보이는 표정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멀어졌는지, 그것을 자각할 겨를도 없이 이헌이 있는 단상 쪽으로 시선이 다시 향했다. 이헌의 곁에는 오늘따라 유독 화려하게 차려입은 시종들이 늘어서 있었고, 평소와는 다른 위엄을 갖추려는 듯 근위대의 배치도 눈에 띄게 많아 보였다. 은서는 그것을 눈여겨보면서도, 설마 자신과 관련된 일이겠느냐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그저 대무도회일 뿐이니까. 매년 이 시기에 열리는, 다인 왕국 귀족이라면 누구나 참석하는 연례 행사일 뿐이니까. 그러나 이헌이 단상 위에서 손을 들어 올리며 좌중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을 때, 은서는 자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는 설은서 양과의 혼약을 파기하겠습니다." 순간 무도회장 전체가 얼어붙은 듯 정적에 휩싸였고, 은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 저게 무슨……. 그녀는 입술을 벌렸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수백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쏟아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훑고 지나갔고, 손끝에 쥐고 있던 부채가 어느새 바닥으로 떨어졌는지도 모르게 그녀의 손아귀에서 힘없이 미끄러졌다. 주변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져나갔고, 누군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미 이 상황을 예견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옆 사람과 눈짓을 교환했다. 은서는 그 모든 시선들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아지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는데, 다섯 해 동안 이 사교계의 중심에 서 있던 자신이 지금 이 순간 가장 낯선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오 년간 은서 양은 훌륭한 협력자였으나, 그것이 부부가 될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이헌은 담담하게,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고, 그의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온 이는 남작령녀 유서아였다.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글썽이는 그 모습이, 은서에게는 지독하게 낯설고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지난 일 년간 사교계에 등장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순수한 얼굴이, 지금 이 순간 이헌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유서아의 드레스는 은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최신 유행의 것이었고, 목에는 낯익은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가 걸려 있었는데, 그것이 왕실 보석함에서 나온 물건이라는 걸 은서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언제부터, 대체 언제부터 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던 걸까. 그녀는 뒤늦게 이헌이 최근 몇 달간 자신을 유독 피해왔던 것을, 회의 자리에서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저 국정이 바빠 그런가 보다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 이 파국을 향해 조용히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저는…… 그저 태자님이 행복하시길 바랄 뿐이에요." 유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자, 주변에서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짜인 각본처럼 완벽한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쳤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감동한 듯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모든 반응들이 은서에게는 낯설고 기이하게만 다가왔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오 년 동안 이헌의 곁에서 밤을 새워가며 조약문을 다듬던 자신의 노력은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은서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는데,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숨이 막혔다. 오 년이었다. 국경 협상 테이블에서 밤을 새우고, 그가 실수할 때마다 대신 뒷수습을 하며, 그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지워온 오 년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이 한마디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지난 시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남부 동맹과의 협상이 결렬 위기에 놓였던 밤, 그녀가 홀로 서류를 붙들고 앉아 대안을 짜냈던 순간. 이헌이 실언으로 다른 왕국의 사신을 노하게 했을 때, 그녀가 대신 나서서 사태를 수습했던 기억. 그 모든 순간에 이헌은 늘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맙다고 말했었다.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이 순간을 위한 연기의 일부였는지, 은서는 이제 와서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 이헌 님." 은서가 겨우 입을 떼자, 이헌은 그녀를 향해 냉랭한 시선을 보내며 손을 저었다.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투에는 조금의 미안함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지금까지 오 년간 함께해온 시간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완벽하게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담담했다. 은서는 그 무심함에 오히려 더 큰 충격을 받았는데, 차라리 그가 미안한 기색이라도 보였다면 이렇게까지 숨이 막히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왕실 근위대가 은서의 양옆으로 다가섰고, 국왕의 이름으로 반포된 명령이 낭독되기 시작했다. 파혼당한 설은서를 사교계에서 즉시 추방하며, 향후 왕실 행사 및 귀족 사교 모임에 그녀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었다. 낭독하는 관리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고, 마치 오늘 날씨를 읽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은서는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의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고, 저 멀리 아버지 설한 공작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시선이 마주쳤을 때, 은서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작은 구원의 신호를 기대했다. 아버지라면, 적어도 아버지라면 딸을 위해 한마디쯤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설한 공작의 눈빛은 마치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듯 무심했고, 그 어떤 동요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이, 무도회장의 그 어떤 소음보다도 크게 그녀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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