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천 년의 계약자

4화

별궁에서의 생활은 은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소란스러웠는데, 그 소란의 대부분이 진하랑이라는 인간의 지독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며칠이 지나서야 완전히 깨달았다. 빨래틀을 처음 본 진하랑이 그것을 마법 유물로 착각해 검을 겨눈 사건이나, 은서가 끓여준 매콤한 면 요리를 처음 맛본 그가 "이 음식은 대체 무슨 요사스러운 향으로 만들어진 것이냐"며 진지하게 물었던 일 같은, 크고 작은 문화충돌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냉기함 문을 여닫는 소리에 매번 흠칫 놀라며 검집에 손을 가져가는 것도, 영상구슬 속 사람들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줄 알고 정중히 답례를 하려던 것도, 은서에겐 하루하루가 웃음을 참는 수련의 연속이었다. 특히 빨래틀 사건 때는 정말이지 심장이 떨어질 뻔했는데, 은서가 빨래를 돌리려고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요란하게 통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 진하랑이 재빨리 그녀를 등 뒤로 밀치며 검을 뽑아 든 것이었다. 은서는 그 상황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웃다가, 겨우 진정하고서야 빨래틀의 원리를 설명해줄 수 있었다. "폐하, 이건 그냥 면이에요. 밀가루로 만든 거고, 요사스러운 거 아니에요." 은서가 한숨을 쉬며 설명하면, 진하랑은 미심쩍은 얼굴로 그릇을 노려보다가도 결국 그것을 남김없이 비우곤 했는데, 그 모습이 어딘지 우스워서 은서는 자꾸 웃음을 참아야 했다. 심지어 국물까지 싹 비우고 나서는 "이 요사스러운 음식을 한 그릇 더 청해도 되겠는가" 하고 정중하게 묻는 통에, 은서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오후, 은서가 별궁 정원에서 세탁물을 널다가 발판이 흔들리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했고, 마침 정원을 지나던 진하랑이 재빨리 팔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순간 두 사람의 몸이 가까워지며, 은서는 그의 손이 자신의 팔을 감싸는 온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바람에 흩날리던 빨랫줄의 흰 천이 두 사람의 시야를 잠시 가렸다가 다시 걷히는 순간, 은서는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말았다. 세필로 그린 듯 단정한 이마와, 안개 낀 숲처럼 깊은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심하라." 그가 낮게 말했지만, 은서는 그 말보다 그의 손이 닿은 부위가 화끈거리는 감각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 그냥 붙잡아준 것뿐인데 왜 이렇게……. "고, 고맙습니다." 은서가 얼른 몸을 일으키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진하랑은 여전히 그녀를 붙든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는가." "없어요, 정말로요." 은서가 애써 태연한 척 답했지만, 그녀의 귀는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것을 눈치챈 도현이 저 멀리서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거, 발판이 워낙 낡아서요. 제가 나중에 새로 사다 놓을게요." 은서가 괜히 발판을 걷어차며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진하랑은 여전히 그녀의 팔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발판이 문제라면, 짐이 새것으로 마련해두겠다." 그가 담담히 말하자, 은서는 그 말이 어쩐지 다정하게 들려서 더욱 얼굴이 화끈거렸다. 새 발판 하나로 이렇게까지 심장이 뛸 일인가, 은서는 스스로를 타박하면서도 좀처럼 그 감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도현이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와 한마디를 던졌다. "거, 두 분 다 손 놓으실 생각은 없으신가 봅니다?" 도현의 농담에 은서는 화들짝 놀라 그의 손에서 벗어났고, 진하랑은 태연한 얼굴로 도현을 향해 나직이 경고하듯 눈을 흘겼다. 그 모습이 하도 자연스러워서, 은서는 자신이 방금까지 얼마나 붉어졌던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뒤늦게 자각하고 손으로 뺨을 가렸다. 그날 밤, 은서는 침소에 누워 낮의 일을 곱씹으며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저 넘어질 뻔한 걸 붙잡아준 것뿐인데, 왜 이렇게 오래도록 심장이 가라앉지 않는 걸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낮에 그의 눈동자가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 그 손의 온도가 얼마나 따뜻했는지를 자꾸만 떠올리고는 스스로에게 짜증을 냈다. 이 자식이, 아니, 이 사람이 대체 뭘 어떻게 했다고 이렇게……. 그녀는 스스로에게 이유를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한 채 이불을 뒤집어썼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물들였고, 은서는 그 빛 속에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은서는 별궁 뒤뜰에서 진하랑과 함께 아침 산책을 하다가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풀잎이 발끝에 스칠 때마다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고,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고요한 아침을 채우고 있었다. "그대의 나라에서는, 혼약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진하랑이 무심한 듯 물었지만, 은서는 그 질문이 결코 무심하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저, 그건…… 보통 가문끼리 합의를 하고, 서로 좋아하지 않아도 결혼을 하기도 해요." 은서는 말끝을 흐리며 애써 가벼운 척 답했지만, 이헌의 얼굴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좋아하지 않아도 혼인을 한다니, 참으로 기이한 풍습이군." 진하랑은 진지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은서는 그 반응이 뜻밖에도 위로가 되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가 이헌을 대신해 사과라도 해주는 듯한 기분이었달까. "거, 폐하의 나라는 다른가요?" 은서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묻자, 진하랑은 잠시 먼 곳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아침 안개가 그의 어깨 위로 옅게 내려앉아 있었고, 그 모습이 어딘지 쓸쓸해 보여서 은서는 괜히 질문을 던진 것 같아 후회가 되었다. "제국에서는, 원치 않는 혼인은 좀처럼 강요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말을 잇다가 다시 멈추었고, 은서는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자신도 함께 숨을 죽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짐은…… 오래전, 진심으로 마음을 준 이가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지만, 은서는 그 짧은 문장 속에 담긴 무게가 자신의 파혼만큼이나 깊은 상처일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그 사람은…… 지금은 어디에 있나요?" 은서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진하랑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 더는 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스치는 그림자가 어찌나 짙던지, 은서는 더 캐물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예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은서는 조용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 햇살이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번지고, 새소리가 정원 가득 울려 퍼졌지만, 진하랑의 얼굴에 남은 그 씁쓸한 여운만은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