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황궁에서의 생활이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아침마다 시녀들이 가져다주는 차의 향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고, 복도를 걸을 때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발소리조차 이제는 편안하게 들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 평온함이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지, 은서는 그날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다인 왕국에서 조사관이 온다고요?"
은서가 되묻자, 도현은 서류를 펼쳐 보이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끝이 문서를 넘기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듯했다.
"박현수라는 자입니다. 설한 공작가의 가령이었다고 하더군요."
박현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은서의 손끝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 찻잔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면서, 도자기 표면에 손톱이 하얗게 자국을 남길 정도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겨진 그녀를 다독여주던 사람 중 하나였다. 밤늦게 서재에서 몰래 울고 있으면 슬그머니 다가와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고, 아버지에게 혼이 나 방에 갇혀 있을 때는 창밖에서 조약돌을 던져 신호를 보내며 몰래 간식을 넣어주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녀를 감시하러 오는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이 참담하게 느껴졌다. 사람이 변한 걸까, 아니면 애초에 변한 적이 없었던 걸까. 은서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왜 여기까지 오는 거죠?" 은서가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묻자, 도현은 다소 조심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다인 왕국 측에서는 그대가 남부 동맹 조약의 외교 초안을 작성한 유일한 인물임을 알고, 그 문서와 함께 그대의 신병 확보를 원하고 있는 듯합니다. 백강현 총리께서도 조약이 은서 님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신 모양이더군요."
은서는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 오 년 전, 밤을 새워가며 문서를 작성할 때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공작가의 딸이니 그런 일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누구도 그녀의 노력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파혼당해 쫓겨난 마당에 필요할 때만 다시 손을 뻗는다니. 세상에 이런 뻔뻔함이 또 있을까. 은서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정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졌다.
* * *
그날 오후, 박현수가 별궁에 도착했다. 회색 관복을 단정히 갖춰 입은 그는 예전보다 살이 조금 빠진 듯했고, 눈가에는 못 보던 주름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은서는 애써 담담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지만, 그의 눈빛은 예전의 다정함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차갑게 굳어 있었다.
"아가씨." 그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 말투에는 이미 존중이 사라져 있었다. "공작님의 명으로 조사를 위해 왔습니다. 그동안 아가씨가 작성한 남부 동맹 조약 관련 문서들, 전부 회수해야겠습니다."
"그건 제가 오 년 동안 밤을 새워 만든 결과물이에요." 은서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손끝에 힘을 준 채였다.
박현수는 조소를 감추지 않으며 대답했다. "결과물이라니요. 어차피 파혼당한 마당에, 그런 것들이 아가씨 것이라 주장할 자격이나 있으신지요."
그 말이 화살처럼 은서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자격이라니. 오 년의 헌신이 파혼 한 번으로 자격조차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그녀를 다시 그 무도회장의 절망 속으로 끌어당겼다. 은서는 그때, 그 순간의 냉기와 시선들,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비웃음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면서도, 그녀는 억지로 등을 곧게 세웠다.
"제가 문서를 만든 방식과 그 안에 담긴 논리는,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요. 그건 사실이잖아요." 은서가 반박하듯 말했지만, 박현수는 눈썹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글쓴이가 누구든, 문서는 공작가의 소유입니다. 아가씨는 이미 그 집안 사람이 아니시니까요."
은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세상의 논리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억울함이 명치 끝에 뭉쳐 있었다.
"게다가." 박현수는 은서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고도 멈추지 않았다. "공작님께서는 아가씨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해하지 않으십니다. 유서아 아가씨가 이제 곧 가문의 정식 손님으로……"
"그만하세요." 은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래도록 눌러왔던 감정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서아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은서의 눈앞이 잠시 흐릿해졌다. 그녀를 대신해 그 자리를 채울 사람. 아버지의 눈에 다시 들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저으며 숨을 조여왔다.
바로 그때, 정원 쪽에서 서늘한 기척이 다가왔다.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먼저 전해졌다. 진하랑이 조용히 그 자리에 나타났다. 검은 예복을 걸친 그의 모습은 세필로 그린 그림처럼 정갈했지만, 그 표정만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그는 박현수를 향해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방 안의 공기를 단번에 얼어붙게 만드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짐의 궁 안에서, 손님에게 그런 무례를 범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군."
박현수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물러설 기색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이는 다인 왕국의 내정에 관한 일로……"
"내정이든 아니든, 이곳은 여명 제국이다." 진하랑의 눈동자가 순간 서늘한 살기를 띠었고, 그 기세에 박현수는 결국 말을 삼켰다. 방 안의 촛불조차 흔들림 없이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
은서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나서준 적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그녀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박현수의 눈빛 속에 스치듯 지나간 서늘한 확신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물러나면서도 고개를 숙이는 척, 다시 한번 은서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눈빛에는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여유가 담겨 있었다.
"……곧, 진짜 이유를 알게 되실 겁니다, 폐하."
그 말을 남기고 박현수는 조용히 별궁을 벗어났다. 뒷모습마저 어딘가 뻣뻣하게 느껴졌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확신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은서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순간 진하랑의 표정에 스친 미세한 그늘만이, 이 평온한 나날 아래 무언가가 조용히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