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여명 제국의 황궁은 다인 왕국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붉은 기와와 검은 대리석 기둥이 끝없이 이어지는 회랑을 걸으며 은서는 자신이 완전히 다른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다인 왕국의 궁전이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면, 이곳은 그저 압도적인 크기와 무게로 사람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둥마다 새겨진 용의 문양은 살아 움직일 듯 생생했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대리석 바닥에서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은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걸었다.
'죽음의 신이라 불리는 황제라니, 이름부터 심상치가 않네…….' 은서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도현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파혼을 당하고 왕국에서 쫓겨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낯선 제국의 황제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들었다.
도현의 안내를 받아 정전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그곳에 앉아 있던 남자를 보고 잠시 숨을 멈추었다. 넓은 정전 안, 높은 단상 위에 놓인 옥좌에 앉은 그는 마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존재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검은 머리카락이 마치 밤의 비단처럼 흘러내렸고, 짙은 눈동자는 안개 낀 숲처럼 깊어서 그 속을 가늠할 수 없었다. 얼굴은 세필로 그려낸 듯 지나치게 단정했으며, '죽음의 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던 소문에 걸맞게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가 바로 여명 제국의 황제, 진하랑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은서는 그 서늘함이 단순히 표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공기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정전 안의 대신들도 그의 시선이 스칠 때마다 살짝 어깨를 움츠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저 사람들도 나랑 똑같은 심정이구나.' 은서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대가 계약의 계승자인가."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는데, 억양이 딱딱하고 예스러워서 은서는 처음엔 그가 화가 난 줄 알았다. "짐이 그대의 모친과 맺은 계약을 이어받을 자로군."
"……저, 그렇게 말씀하시니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은서가 얼떨결에 대답하자, 진하랑은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 시선이 얼마나 강렬한지, 은서는 순간 자신의 온몸이 투명한 유리처럼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짐은 그대를 해할 마음이 없다." 그가 담담하게 말했지만, 정작 그 무뚝뚝한 어조가 위로가 되기는커녕 더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은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위로랍시고 하는 말이라면, 이 사람 사교성이 심각하게 부족한 게 틀림없다고. 죽음의 신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가 어쩌면 살벌한 전투 실력이 아니라 저 서늘하고 딱딱한 말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여기서 뭘 해야 하나요?" 은서가 조심스럽게 묻자, 진하랑은 잠시 침묵한 뒤 뜻밖의 답을 내놓았다.
"당분간 황궁 별궁에 머물도록 하라. 신분은 밝히지 않는다. 짐의 먼 친척으로 위장하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네? 저, 저기 잠깐만요, 그러면 제가 폐하와 같은 궁에서 지낸다는 말씀이신가요?" 은서의 얼굴이 화끈거리며 붉어졌지만, 진하랑은 그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문제라도 있는가."
"아, 아니요, 문제는 없는데……" 은서는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렸고, 옆에 서 있던 도현이 살짝 웃음을 참는 듣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은서는 억울한 마음에 도현을 슬쩍 흘겨보았지만, 도현은 짐짓 모른 척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정전을 나서는 길에 은서는 대신들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낯선 이방인을 향한 호기심과 경계심이 뒤섞인 눈빛들이었다. '먼 친척으로 위장한다고 해서, 정말 저 사람들이 믿어줄까.' 은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많은 시선을 한꺼번에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그저 걸음을 재촉해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 *
별궁으로 안내된 첫날 저녁, 은서는 제국식 만찬 예법을 배우다가 뜻밖의 문화충돌을 겪었다. 상다리가 부러질 듯 차려진 만찬상 위에는 처음 보는 음식들이 즐비했는데, 은서는 그 화려함에 잠시 감탄했다가도 곧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이곳에서는 손님이 먼저 수저를 들지 않으면 주인이 식사를 시작할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는데, 진하랑은 그 사실을 은서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은 채 그저 그녀가 수저를 들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은서는 처음에 그가 그저 식사에 관심이 없거나, 혹은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 은서는 젓가락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부담을 느꼈다. '이거 왜 이렇게 오래 쳐다보는 거지, 내가 밥 먹는 게 그렇게 신기한가.' 속으로 온갖 억측을 다 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배고픔을 참지 못한 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왜 안 드세요?" 은서가 어색하게 묻자, 진하랑이 무심한 얼굴로 답했다.
"그대가 먼저 들어야 하는 법도이니."
"그럼 진작 말씀해주시죠! 저는 폐하가 저를 기다리시는 줄도 몰랐잖아요!" 은서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자, 진하랑은 처음으로 미묘하게 입가를 움직였는데, 그것이 웃음인지 아닌지 은서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짐도 그대가 이렇게 늦게 알아챌 줄은 몰랐다." 그가 낮게 덧붙이자, 은서는 그것이 놀리는 말인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얼굴만 더 화끈거렸다. 그렇게 겨우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지만, 진하랑이 음식을 드는 태도마저 지나치게 절제되어 있어서 은서는 자신이 게걸스럽게 먹는 것처럼 보일까 봐 젓가락질조차 조심스러워졌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왕국에서 굶을 걸 그랬나.' 하는 자조적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시녀 하나가 다가와 은서에게 별궁의 생활 규칙을 조심스럽게 일러주었다. 이곳에서는 정해진 시간 외에는 함부로 궁을 벗어날 수 없으며, 폐하의 처소와 가까운 곳에 머물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은서는 또다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은서는 낯선 침소에 홀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파혼당하고, 추방당하고, 이제는 정체도 밝히지 못한 채 낯선 황제의 궁에서 지내야 하는 처지라니, 이보다 더 기구한 신세가 있을까. 침대는 비단으로 감싸여 있었지만, 그 부드러운 촉감마저도 지금의 처지를 위로해주지 못했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낯선 밤공기와 이국의 새소리가 은서의 마음을 더욱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서늘하고 딱딱한 황제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그녀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뚝뚝하다 못해 무심하기까지 한 그 말투와, 그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게 자꾸만 그녀를 지켜보던 짙은 눈동자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설마 이런 생각을 하다니, 미쳤나 봐.' 은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며 애써 눈을 감았지만, 안개 낀 숲 같던 그 눈동자는 좀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은서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 낯선 궁에서의 첫날밤이, 앞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밤들 중 가장 평온한 밤이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