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경사는 45도였다.
속도계는 시속 62킬로미터를 가리켰다.
마지막 점프였다.
이 활강을 끝내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월요일 회의, 화요일 보고서, 수요일 야근.
그 지겨운 목록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마지막이라는 말에 더 힘을 줬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장갑 안쪽 손끝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웃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회사도, 상사도, 통장 잔고도 떠오르지 않았다.
보드 끝이 얼음판을 물었다.
예상보다 딱딱했다.
몸이 붕 떠올랐다.
하늘이 아래로 보였다.
그 짧은 순간, 시간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발밑에서 보드가 사라졌다.
팔을 뻗었는데 잡을 게 없었다.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그다음은 기억이 없다.
정확히는, 기억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고통도 없었다.
소리도 없었다.
그냥, 끊겼다.
눈을 뜨려고 했는데 눈이 없었다.
손을 뻗으려고 했는데 손이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없었다.
말도 없었다.
그냥 뜻이 오갔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몸이 없는데 존재한다는 감각.
말을 하지 않는데 대화가 되는 감각.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계약을 원하나."
질문 같기도 하고 통보 같기도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쪽은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지 않았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마치 매수자가 매도자의 승낙을 형식적으로 구하는 것 같은.
"조건은 나중에 안다."
그 말이 이상하게 편안하게 들렸다.
조건을 모른 채 사인하는 계약서.
26년을 살면서 그런 짓은 딱 한 번 해봤다.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 한 번이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가 나빴다는 감각만은 선명했다.
숫자로 남아 있었다.
마이너스로.
그런데도 나는 그 뜻에 손을 얹었다.
손이 없었는데도 그렇게 했다.
이상하게도, 이 상황에서 거절이라는 선택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죽음 다음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던 사람에게, 이 뜻 없는 제안은 유일한 다음 페이지처럼 보였다.
그다음, 다시 어두워졌다.
숨이 막혀서 눈을 떴다.
울음소리가 났다.
내 목에서 나는 소리였다.
목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소리를 멈출 방법을 몰랐다.
성대를 어떻게 쓰는지도 몰랐다.
그냥 울음이 저 혼자 터져 나왔다.
천장이 낮았다.
조명이 노란색이었다.
누군가 나를 안고 있었다.
품 안이 따뜻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누군가의 심장이었다.
내 것이 아니었다.
"나은아. 나은아."
그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낯선 이름이었다.
그런데 몸이 먼저 반응했다.
울음이 더 커졌다.
이름을 들었을 때 몸이 먼저 움직인다는 게 이상했다.
정신은 아직 26년 치 기억을 붙잡고 있는데, 몸은 다섯 살짜리의 반사로 움직였다.
그 어긋남이 낯설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손이 작았다.
너무 작았다.
손가락 다섯 개가 내 팔뚝 절반보다 작았다.
손톱도 작았다.
손톱 끝이 동그랬다.
성인 남자였던 내 손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죽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게 아니라, 이미 살아 있던 몸에 들어왔다.
서나은.
다섯 살.
여자아이.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서나은.
낯설었다.
그런데 이 몸의 성대가, 이 몸의 심장이, 이미 그 이름에 반응하고 있었다.
어머니라는 여자가 나를 안고 있었다.
애쉬그레이 색 머리카락이 내 얼굴에 닿았다.
눈가가 붉었다.
울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본 얼굴이었다.
피부가 창백했다.
며칠 밤을 못 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눈빛만은 또렷했다.
"밥은 먹었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방금까지 울다가 던지는 말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섯 살의 성대로는 아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 몸이 아직 말을 배우는 중이었다.
스물여섯 해의 어휘가 머릿속에 가득한데, 그걸 꺼낼 통로가 없었다.
그 답답함이 몸 안에서 부풀어 올랐다.
"열이 심했어. 사흘이나."
사흘.
그 숫자가 이상하게 무겁게 들렸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사흘을 앓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 내가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사흘 동안 이 여자는 뭘 했을까.
병원을 오갔을까.
밤새 이마에 물수건을 올렸을까.
눈가의 붉음이 그 사흘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손이 차가웠다.
그런데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 이제 괜찮아."
같은 말을 세 번 되풀이했다.
나한테 하는 말인지 자기한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세 번째 말이 끝날 때,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울음을 참는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상하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 여자의 진짜 딸이 아니었으니까.
그날 밤, 나는 천장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스물여섯 살이었다.
스노보드를 타다 죽었다.
그리고 다섯 살 여자아이로 깨어났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작은 손과 이 낮은 천장, 이 노란 조명은 전부 현실이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여봤다.
엄지, 검지, 중지.
전부 반응했다.
낯설지만, 분명히 내 몸이었다.
어머니는 내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가 고르지 않았다.
자면서도 뭔가를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숨소리 사이사이에 작은 떨림이 섞여 있었다.
잠든 사람의 몸이 저렇게 긴장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낯선 얼굴이었다.
그런데 낯설지 않았다.
이 몸의 기억 어딘가에 저 얼굴이 이미 새겨져 있었다.
이름조차 몰랐다.
그런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 안쪽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 몸에 새겨진 감정이 내 감정보다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7시 40분.
어머니가 아침을 차렸다.
밥, 국, 그리고 계란말이.
평범한 상이었다.
수저를 드는 손이 아직 서툴렀다.
숟가락 끝이 자꾸 밥그릇 가장자리에 부딪혔다.
어머니가 그 모습을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탁 위에 신문이 놓여 있었다.
1면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남녀 성비 1:15, 정부 대책 마련 시급]
숫자를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
1대 15.
남자 한 명에 여자 열다섯 명.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기사 아래에는 작은 표까지 붙어 있었다.
연령대별 성비 그래프였다.
숫자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격차가 더 벌어졌다.
젊은 층일수록 남자가 더 드물었다.
어머니가 신문을 접어 옆에 놓았다.
그러다 내 시선을 눈치챘다.
"뭘 그렇게 봐."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섯 살짜리가 성비 기사를 읽는 게 이상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눈동자만 신문에서 접시로 옮겼다.
"아니에요."
겨우 그 말만 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너무 어른스러운 발음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하게 나왔다.
다섯 살 아이의 발음이 아니었다.
발음뿐만 아니라 어미의 처리까지 너무 정확했다.
어머니의 눈이 살짝 커졌다.
뭔가를 물으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삼켰다.
숟가락을 든 손이 잠깐 멈췄다.
그러고는 다시 움직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늘부터 유치원 가야지."
대신 그 말을 했다.
유치원이라는 단어에 심장이 조여들었다.
다섯 살 아이들 사이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스물여섯 해를 살았던 정신으로, 다섯 살배기들과 놀아야 했다.
블록을 쌓고 노래를 부르고 낮잠을 자는 시간표.
그 시간표 속에 내가 들어가야 했다.
견딜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1대 15.
이 숫자가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았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다섯 살짜리가 물어볼 질문이 아니었다.
혼자 추측만 늘어놓았다.
남자가 귀해진 사회에서는 결혼 제도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군대는 여전히 존재할까.
직장에서 남자와 여자의 비중은 어떨까.
질문은 늘어나는데 답할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가 내 옷을 갈아입히며 중얼거렸다.
"우리 나은이는 씩씩한 여자로 자라야 해."
그 말투가 이상하게 단호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신념처럼 들렸다.
옷소매를 당기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말투와 손의 힘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남자한테 의지하지 않아도 괜찮은 여자."
또 그 말이었다.
나는 옷 소매에 팔을 끼우면서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표정이 딱딱했다.
뭔가를 지키려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보며 궁금해졌다.
누구로부터 지키려는 걸까.
남자로부터.
아니면 이 세상 자체로부터.
집을 나서기 전, 어머니가 내 머리를 빗겨줬다.
빗질이 서툴렀다.
엉킨 머리카락을 잡아당길 때마다 나는 눈을 찡그렸다.
"아파?"
"조금요."
"참아. 예쁘게 해야지."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예쁘게, 라는 말이 스물여섯 살 남자의 정신에는 아직 낯설었다.
거울 속에 낯선 얼굴이 있었다.
동그란 눈과 짧은 앞머리.
그 얼굴이 웃고 있었다.
내가 웃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어색했다.
어머니가 내 웃음을 보고 갑자기 멈췄다.
빗을 든 손이 허공에서 멈춰 있었다.
거울을 통해 어머니의 표정이 보였다.
숨을 멈춘 얼굴이었다.
뭔가를 본 사람의 얼굴이었다.
"방금 그 표정."
"네?"
"아니야."
어머니는 다시 빗질을 이어갔다.
그런데 손끝이 아까보다 조심스러워졌다.
눈가가 다시 붉어져 있었다.
빗질 속도가 느려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같은 자리를 계속 빗었다.
방금 그 표정이 뭐였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반응이 유난히 컸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혹시 원래 이 아이의 표정과 다른 걸 본 걸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표정을 본 걸까.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 머릿속에 쌓여갔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어머니가 내 손을 꽉 잡았다.
너무 세게 잡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눌리는 느낌이 났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놓지 않겠다는 힘이 느껴졌다.
"엄마가 있잖아."
그 말이 왜 나온 건지 몰랐다.
방금까지 나눈 대화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엄마가 지켜줄 거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다섯 살 딸을 유치원에 처음 보내는 부모의 감정이라기엔, 뭔가 더 있는 것 같았다.
목소리에 실린 무게가 유치원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훨씬 더 큰 무언가를 앞두고 하는 말 같았다.
나는 대답 대신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작은 손과 큰 손.
둘 다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잠깐 숨을 멈췄다.
그러고는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를 오래 바라봤다.
몇 초였는지 셀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몇 초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바깥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방금 그 눈빛.
딸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뭔가를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유치원 가는 길 내내, 그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걸음마다 어머니의 손이 내 손을 조금씩 더 세게 쥐었다.
마치 놓치면 안 되는 것을 붙잡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그 손을 마주 잡은 채, 이 세계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할지 알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다.